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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범죄수익환수팀장의 분투기 “야! 니가 검사면 나는 대통령이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서부지검 범죄수익환수팀입니다”라는 인사말이 끝나자마자였다. 전화 수신자의 반응은 대부분 욕설로 시작했다. 검사나 검찰 수사관의 전화는 보이스피싱이라는 게 이 시대의 ‘국룰’ 아니던가. 이어지는 통화에서 의심은 증폭됐다. “불법대부업 초과이자 납부 피해자분들의 피해 진술을 청취하고 피해 회복을 도와드리기 위한 지원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뚜-.” 전화가 끊겼다.

연 1000% 고리대금업자의 범죄수익 22억원
몰수·추징 안 돼 피해자가 돌려받게 법률 지원
피싱범 몰려 “인생 그렇게 살지 마” 혼나기도
검사 불신 시대 “할 일 잘해야 존재감 생긴다”

김지영 서울서부지검 부장검사는 지난 10일 인터뷰에서 “누구나 사기 피해를 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가 이끈 범죄수익환수팀은 불법대부업 피해자 1500명의 피해 복구를 도운 공로로 지난달 법조언론인클럽이 주는 ‘올해의 법조인상’을 받았다. 김경록 기자
누구라도 보이스피싱으로 의심할 만한 전화는, 그러나, 진짜였다. 지난해 7~8월 서울서부지검 범죄수익 환수팀은 이런 전화를 불법대부업 피해자 1500여 명을 상대로 돌렸다. 제대로 된 통화가 이뤄질 때까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다. 팀장인 부장검사 김지영(49·서울서부지검 공판부장 겸임)과 5명의 팀원이 벌인 ‘맨땅에 헤딩’이었다.

그 덕분에 수사팀은 최근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칭찬을 들었다. 지난달 전·현직 법조기자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법조언론인클럽으로부터 ‘올해의 법조인상’을 받은 것이다. 김 부장검사는 “검찰 공무원이 되자마자 온갖 욕설을 들은 막내 수사관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검사와 수사관들은 무슨 연유로 보이스피싱범으로 몰리는 수모를 감수했을까. 지난 10일 서울서부지검에서 김 부장검사를 만났다. 반년 넘게 이어진 그들만의 분투기를 소개한다.

범죄수익 22억원을 지켜라
“너무 화나지 않니?” 지난해 여름, 김 부장검사가 책상을 내리쳤다. 불법대부업자 2명에 대한 항소심 선고 때였다. 1000억원대 무등록 대부업을 하면서 피해자 2200여 명으로부터 제한이자율(연 20%)을 초과한 이자 약 160억원을 받은 혐의(대부업법 위반)로 기소된 피고인들이었다. 이들은 곤경에 처한 피해자들을 상대로 연이율 1000%의 이자를 챙겼다. 2000만원을 빌려주고 열흘 뒤에 4000만원을 받아가기도 했다. 이 수사에서 검찰은 범죄수익으로 의심되는 현금과 수표 등 22억원을 압수했다. 그런데, 법원은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도 압수물에 대한 몰수·추징은 기각했다. 압수된 금품이 해당 범행으로 취득한 것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김 부장검사는 공판부장으로서 이 사건의 공소유지를 담당했다. 피해자들이 뻔히 있는데 검찰이 확보한 돈을 다시 범인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수사팀이 애써 22억원을 확보했는데, 이걸 다시 돌려줘야 한다니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라고 회고했다. (김 부장검사는 기자 앞에서도 책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22억원이 범죄자들에게 돌아가기 전에 피해자들이 민사 소송을 걸어 피해 금액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해자가 소송할 수 있게 일일이 알려야 했다. 문제는 누가 그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검찰도 여느 직장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바빴고 인력은 빠듯했다. 1500명이나 되는 피해자와 접촉하는 건 현재의 시스템에선 누군가를 괴롭게 할 가욋일이었다. 책상은 수없이 내리칠 수 있어도 선뜻 나서기는 어려운 법이다. 누군가 ‘저지르기’ 전까지. 김 부장검사는 후배 안제홍 검사와 뜻을 모았다. “좋은 일 한 번 해보자.”

우선 피해자들의 의사를 타진해야 했다. 이들에게 연락해 검찰의 ‘선의’를 알렸다. 그랬더니 기사 첫 줄에 소개한 반응이 나왔다. 상냥한 목소리의 김 부장검사도, 신뢰감 넘치는 안 검사도 꼼짝없이 보이스피싱범으로 몰려 무수한 욕을 먹었다. 이미 고리대금업자에게 수천만 원을 뜯긴 피해자들이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

“장기 밀매 하려는 거죠?”
열정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상부의 허락을 받아 인력 확보와 조직 구성을 했다. 그래도 “사람 좀 빌려 달라”는 부탁에 다른 부서장들이 난색을 보였다. 가까스로 수습 여성 수사관 3명을 확보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울서부지부와 간담회를 열어 공익소송 협업 구조를 만들었다. 수사기록에 있는 피해자들의 연락처를 찾아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 2200여 명 중 약 1500개의 연락처가 확보됐다.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초과이자를 낸 피해자들에게 피해를 복구할 수 있는 압수물 보전조치 등을 알렸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전화 통화 ‘시나리오’도 만들었다. 서부지검 7층에 마련한 사무실에 새로 만든 일반 전화를 뒀다. 점점 보이스피싱 조직을 닮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 검사와 수사관들이라는 점만 달랐다. 피해자들에게 취지를 알리고 청사에 방문해 달라고 안내했다.

의심을 불식시키는 건 쉽지 않았다. 개인정보나 계좌번호를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우리 사회의 불신은 깊고 깊었다. 김 부장검사는 “한 젊은 여성 피해자는 끝까지 의심을 했다. ‘검찰청사 앞에 가면 숨어 있다가 납치해서 장기 밀매를 하려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 말했다. 전화를 돌린 20대 여성 수사관들의 젊은 목소리도 오해를 샀다. 경험이 다소 부족하고 서툴러 보이는 안내에 일부 피해자는 “너희들 진짜 인생 그렇게 살지 말아라”라고 훈계했다. 검사와 고참 수사관이 여러 돌발 상황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추가로 시켰다. 1500명과 1차 접촉을 하는 데에 약 2주가 걸렸다. 최근 회식 자리에서 수사관들은 “한 달여 동안 평생 들을 욕은 다 먹은 것 같다”고 회고했다. 김 부장검사는 “부모에게도 욕 한 번 안 먹었을 MZ 세대가 고생이 많았다”면서도 “주도적으로 일할 기회가 없는 수습 시절에 해보기 어려운 경험을 한 것이라고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웃었다.

김 부장검사를 포함한 6명의 특공대가 벌인 작전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22억원 중 약 12억원은 법원에 공탁돼 있고 10억원은 불법대부업자 측에 돌려줬다. 법률구조공단을 통한 소송과 피해자 개인이 진행한 소송 등 약 400건이 진행 중이다. 5명의 피해자는 본안 소송까지 이겨 약 4000만원을 돌려받았다고 한다.

절반의 성공, 입법 보완 필요
김 부장검사는 “피고인들에게 10억원이 다시 돌아가는 상황이 착잡했다”고 했다. 이어 “대부업법 위반 범죄가 부패재산몰수법상의 피해 재산 환부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점은 입법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2022년부터 시행된 부패재산몰수법은 사기, 공갈, 횡령, 배임, 뇌물, 도박 등의 경제범죄로 얻은 재산을 몰수할 수 있고 다른 재산과 섞인 경우에도 부패재산의 비율만큼 몰수가 가능하게 정했다. 대부업법 위반도 몰수 대상 범죄에 포함됐다면, 몰수·추징이 용이해 피해 회복에 더 유리했을 것이라는 게 김 부장검사의 주장이다. 대검찰청에서도 범죄 피해자들에게 범죄수익을 돌려주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갈 길이 먼 것이다.

계엄과 탄핵, 내란죄 등 중후장대한 논쟁이 온 나라를 뒤덮은 상황에서 일선 검찰청 범죄수익환수팀의 노력은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화려한 ‘법 기술’이 난무하는 시대에 소박한 ‘법 상식’을 지킨 노력은 평가받아야 한다. 김 부장검사는 “기술은 없었고 ‘무대뽀’와 열정만 있었던 것 같다. ‘고생 좀 해서 좋은 일 해보자’ 이런 마음이었다”고 했다.

김 부장검사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10여 년 전에 나도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검찰청 직원이라길래, 감쪽같이 속아서 ‘어머 반갑습니다. 어느 검사랑 일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전화를 끊어버리더라. 그 뒤에도 한참 그냥 전화가 끊어진 건 줄 알았다”고 말했다. 김 부장검사는 “누구나 속을 수 있다. 그건 피해자 잘못이 아니다. 이번 사건 피해자들은 본인이 급해서 돈을 빌렸기 때문에 자신이 불법을 저지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언론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이유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서 피해를 사전에 막고, 피해 회복을 할 길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김 부장검사는 “3년 전 부산 근무 때, 가짜 무당이 사회 초년생들을 점괘로 속여 6억여원을 챙긴 사건을 수사했다. 범인을 구속한 뒤 피해자들로부터 ‘정말 죽고 싶었는데, 검사님 통해서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다시 살 수 있는 희망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받았다”며 “대형 사건을 수사했을 때보다 더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옵티머스 사건 주임검사
김 부장검사는 서울대 법대(95학번)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연수원 36기)한 뒤 검사로 임관했다. 남편도 현직 검사인 검사 부부다. 고교생·중학생 남매의 엄마이기도 한 김 부장검사는 “엄마로는 늘 미안하지만, 검사로서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일한다”고 말했다. 2020년 서울중앙지검의 특수부 부부장 검사로 일할 때 1조 원대 사모펀드 사기 사건인 옵티머스 자산운용 사건의 주임 검사를 맡았다. 이 사건은 주범에게 재산 범죄 역대 최고형량인 징역 40년형이 확정돼 화제를 모았다. 최근엔 서부지법 폭력 사태 수사에 참여했다.

검찰 불신의 사회, 신뢰 실종의 시대를 살아가는 중견검사의 삶이 녹록지 않을 것 같았다. 김 부장검사는 “검찰이 문 닫게 될 거라는 비판을 자주 듣는다. 후배들에겐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고, 지금 (문을) 안 닫았는데 닫을 것처럼 일 안 하면 진짜 문 닫는 것 아니겠냐.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면 우리 존재감을 알아주는 때가 오지 않겠느냐’라고 얘기한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그렇게 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승현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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