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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경기도 성남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주총회에 주주들이 참석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5일 오전 9시, 경기도 성남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주총회. 이날 관심사는 회사가 주총 4일 전인 20일 공시한 3조6000억원 규모 ‘유상증자 폭탄’이었다. 서울 영등포구에서 온 주주 김모(30) 씨는 “회사가 주총 직전 기습적으로 주가에 대형 악재인 유증을 발표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관련 질문이 쏟아지자 한상윤 한화 전무는 “국내 시장에선 유증 검토·단행을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보안을 잘 지켜야 했다”고 설명했다.

한화의 사례는 미국 항공·방산업체인 보잉 사례와 대비된다. 보잉은 지난해 10월 창업 109년 역사상 최대 규모인 243억 달러(약 35조원) 규모 유증을 잡음 없이 마쳤다. 파이낸셜타임스(FT)·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주요 외신은 ‘이정표 설정’ ‘과감한 결정’이라고 분석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보잉은 자금 부족에 따른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과 대규모 자본조달 필요성을 사전에 투자자에게 충분히 설명했다”며 “회사에 대한 시장의 신뢰와 최고경영진의 일반 주주에 대한 배려의 수준이 국내 기업들과 달랐다”라고 평가했다.

중앙일보가 삼성전자·SK텔레콤·현대차·포스코홀딩스·롯데쇼핑 등 재계 20대 그룹 주요 계열사의 올해 주총 현황을 분석한 결과, 일정(수퍼 주총데이)와 형식(공시 부실), 내용(주주환원 실종) 등 3개 측면서 모두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지난해 주주 목소리를 반영한 ‘밸류업(기업가치 제고)을 강조했지만, 정작 주총장에서 기업들은 형식적으로 ’반대하시는 분 없습니까?‘라고 묻고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스테파니 린 아시아기업거버넌스협회(ACGA) 한국·싱가포르 총괄연구원은 “한국 주총의 가장 큰 문제는 주주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점”이라며 “기업 주총일이 특정 날짜에 몰려있고, 표결 과정도 불투명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특히 14일이라는, 짧은 주총 소집 통지 기간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이끄는 미국 버크셔 해서웨이는 보통 5월에 주총을 연다. 네브래스카 주 시골 마을 오마하에서 열리는 주총엔 매년 주주 2만여 명이 참석한다. 버핏과 경영진이 5~6시간 동안 주주들의 깊이 있는, 때론 시시콜콜한 질문에 답하며 주총을 ‘소통의 축제’로 만든다. 일론 머스크(테슬라), 젠슨 황(엔비디아), 팀 쿡(애플) 같은 미국 빅테크 기업 최고경영자(CEO)도 주총에 직접 나와 주주 앞에 선다.
김주원 기자

구체적으로 특정 기간에 기업들의 주총이 몰려 있는 ‘수퍼 주총데이’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사대상 20곳 중 15곳(75%)이 3월 넷째주에 주총을 열었다. 지난달 26일에만 8곳의 주총이 몰렸다. 특정일에 주총이 집중되면 주주가 다양한 주총에 참여할 수 있는 선택권·접근권이 떨어진다. 게다가 주총장에선 안건의 주요 항목만 간단히 언급하거나 “자세한 내용은 자료를 참고하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기준 상장사 793곳의 주총 평균 소요시간은 33분에 불과했다(한국상장사협의회). 한 대기업 투자설명회(IR) 담당자는 “의사 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일부 주주가 부담스럽다보니,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주총을 한 날로 몰았다”고 털어놨다.

‘초치기’ 관행도 여전했다. 한국거래소는 주총 4주 전까지 소집 공고를 권고한다. 일본은 3주 전까지 공시하도록 했는데, 토요타·소니·미쓰비시상사 등은 지난해 주총 4주 전 일찌감치 안건을 공시했다. 하지만 본지 조사대상 기업 20곳 중 주총 2주 전까지 사업보고서를 공시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삼성전자·현대차·LG전자·포스코홀딩스·한화 같은 대기업조차 주총 8일 전에야 안건을 공시했다. 안건 설명도 부실해 이사 후보자 직무수행 계획에 대해 “건설적으로 논의하겠다” 수준으로 적어놓은 경우도 있었다.

주주 환원도 실종됐다.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핵심 지표 중 하나인 ‘주주제안 안건’을 상정한 회사는 조사 대상 20곳 중 이마트가 유일했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소액주주 움직임이 늘었다 해도 여전히 대주주 외에 소액주주가 올린 안건은 ‘가뭄’ 수준”이라며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지 않은 특수한 지배구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나예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주총을 연 상장사 2460곳 중 2.4%(41곳)가 주주제안 안건을 올렸는데, 이 중 배당, 자사주 소각 등 주주 환원과 관련해 가결된 안건은 1건에 불과했다”며 “상장사 681곳에서 이사 보수 한도 승인 안건을 올려 100% 가결된 것과 대비된다”고 말했다.

기업도 할 말은 있다. 자사주 외에 대주주가 경영권을 방어할 뾰족한 수단이 없는 상황이라서다. 선진국에선 폭넓게 허용하는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 도입 논의도 공전 중이다. 여기에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 트럼프 관세,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개정안 추진 등 기업에 ‘악재’가 잇따르고 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주총을 업그레이드하려면 정부가 기업에 채찍만 들 게 아니라 밸류업을 위한 당근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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