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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민 발등 찍은 미국발 관세전쟁
관세에 민감한 차이나타운 가보니
식료품점 매장 가득 재고 쟁였지만
"재고 소진되면 가격 인상 불가피...
100달러짜리 월병 누가 사먹을까"
"미국 의류 제품 33% 인상" 전망도
토요일인 1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대형 아시아 식료품점 계산대 앞에 손님들이 모여 있다. 이날 이 가게는 관세 전쟁 여파로 가격이 오르기 전 필요한 물건들을 쟁이기 위해 찾은 쇼핑객들로 북적였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불과 어제 99센트였는데, 다 팔려서 가격을 올렸어요. 20개들이 1박스 가격이 2달러 올랐거든요."

12일(현지시간) 오후 1시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대형 아시아 식료품점. 이 가게 사장 밀 레이가 봉지당 1.09달러짜리 '태국산 쌀가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우리는 구매량이 많아서 다른 가게들보다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며 "1.29달러, 심지어 1.49달러에 파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홍콩산 '닭고기맛 즉석면'은 원래 4달러였던 것을 지난주 5달러로 올렸는데도 그날 바로 품절됐다"고 그는 덧붙였다.

레이의 가게는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큰 식료품점 중 하나다. 제품 대부분은 중국산이고, 한국과 베트남·태국·말레이시아 등에서 수입한 제품들도 있다. 저렴한 가격 덕에 평소에도 오는 사람이 많지만 "오늘은 특히 바쁜 날"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실제, 토요일을 맞아 물건을 쟁이러 온 손님들로 매장은 종일 북새통이었다. 각종 식재료를 두 팔 가득 끌어 안은 린다 장은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살 수 있는 만큼 가져가려 한다"고 말했다.

1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아시아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밀 레이가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가 145%로 인상된 데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의 앞에 놓인 쌀가루는 평상시 89센트에 판매됐던 제품이지만, 태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인상 여파로 1.09달러로 가격이 올랐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차이나타운은 '재고 쟁이기' 전쟁 중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미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중국인 밀집 지역이다. 중국 음식점과 식료품점, 약국, 잡화점 등이 몰려 있다.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의존도가 큰 특성상, 미중 관세 전쟁의 영향도 가장 빠르고 선명하게 나타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산 수입품에 10%의 관세를 부과한 지난 2월 4일 이후, 차이나타운 상인들의 일상은 전과 달라졌다. 레이는 "하루 수백 통씩 도매상들과 가격 관련 통화를 한다"며 "관세 정책이 계속 변하고, 기존 가격에 최대한 많은 재고를 확보해 두려는 가게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공급업체와 합의한 가격이 단 하루 만에 바뀌기도 한다"고 전했다. 미국이 던진 상호관세에 중국이 맞불 관세를 부과하고, 다시 미국이 보복 관세를 더하는 악순환이 지속되며 중국산 수입품 관세율은 이달 10일 145%까지 올랐다. 레이는 간장 도매업체 측으로부터 받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여줬다. "방금 공급업체 가격이 20% 올랐다. 가격 인상이 생각보다 일찍 적용될 수도 있겠다"고 적혀 있었다.

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대형 아시아 식료품점 안에 재고 박스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다. 이 탓에 가게 계단은 한 사람만 간신히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대형 아시아 식료품점 화장실에 재고들이 쌓여 있다. 매장 창고는 물론 통로 곳곳에 재고품을 적재하고도 공간이 부족해서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레이 가게는 재고 박스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창고는 물론이고 매장 구석구석, 심지어 화장실에까지 재고품이 쌓여 있었다. 그는 "2주 전 주문한 태국산 쌀 500포대가 곧 들어올 텐데, 더는 둘 곳이 없어 집 차고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재고까지 바닥나면 도매가 인상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장 다음 달에는 중국 단오절이 있고 너덧 달 뒤엔 중추절이 기다리고 있다. 월병 같은 중국 전통 음식 수요는 커질 텐데, 가격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레이는 "40달러에 팔던 월병에 관세 145%가 부과되면 100달러가 넘어간다. 누가 그 가격에 월병을 사먹겠나"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1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대형 아시아 식료품점에서 샌프란시스코 시민 린다가 두팔 가득 물건을 집고 있다. 그는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살 수 있는 만큼 사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그저 먹고사는 게 걱정인 사람들



이날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상인·소비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극히 평범했던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일 물건값도 예상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물건을 사두는 일뿐이라는 무력감이 그들 표정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지척에 있는 실리콘밸리의 빅테크들이 같은 날 발표된 미국 정부의 '스마트폰, 노트북에 대한 상호관세 면제' 결정에 '환호성'을 내지른 장면과도 극명하게 대비됐다. 고가품이나 주식 시황 같은 데 생각을 둘 여유 따위는 이들에게 없었다.

차이나타운의 유명 포춘쿠키 전문점 점원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그는 "가뜩이나 (주재료인) 달걀값이 많이 올랐는데 관세 문제까지 겹쳐 가게 운영이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이 가게의 대부분 제품은 매장에서 만들어 바로 판매하는 미국산이지만, 참깨 등 일부 재료와 포장 박스, 봉투는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을 쓴다. "중국산 포장재 가격이 너무 올라 베트남산 등을 알아봐야할 처지"라고 한다.

1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포춘쿠키 전문점에서 한 점원이 쿠키를 포장하고 있다. 이 가게는 중국산 포장재를 쓰고 있는데,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인상 여파로 베트남산 이용을 검토 중이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관세 전쟁, 자국민 제 발등 찍은 격



이는 차이나타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대다수 소비자들도 이미 트럼프발(發) 관세 전쟁의 포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최대 전자상거래 플랫폼인 아마존을 통해 미국 소비자들에게 물건을 파는 중국 기업 상당수가 가격 인상 또는 미국 시장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 중국은 아마존 전체 판매자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영국 가디언은 "트럼프가 미국 이외 국가들에 대해서는 상호관세를 90일간 유예하기로 했지만, 10%의 기본 관세만으로도 미국 경제에 영향을 줄 것"이라며 "블루베리부터 자동차, 와인, 초콜릿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제품의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최근 미국 예일대 예산연구소는 트럼프가 부과한 일련의 관세가 의류 가격을 평균 33%, 의류가 아닌 섬유제품은 18%, 신선식품은 6.2% 상승시킬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다. 실제, 이탈리아 신발 브랜드 라부크는 이달 중 미국 내 가격을 10%, 내달 추가로 10% 인상하겠다고 최근 공지했다. 가디언은 "일부 기업들은 가격은 그대로 두고 감자칩 봉투나 음료병 크기를 줄이는 방식(슈링크플레이션)으로 비용 증가에 대응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윤이 적은 저가 제품들을 아예 없애고 고가 제품만 남겨 실질적인 가격 인상 효과를 꾀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 대통령이 시작한 관세 전쟁에 당장 자국민들이 먼저 고통받고 있는 셈이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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