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재개된 평양마라톤 엿보기
외국인 관광객 입맛 맞추기 노력 흔적
1인 300여만원 내고도 촬영엔 제한
北, 외부 반응 살피며 개방 속도 조절할 듯
외국인 관광객 입맛 맞추기 노력 흔적
1인 300여만원 내고도 촬영엔 제한
北, 외부 반응 살피며 개방 속도 조절할 듯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6일 평양에서 열린 평양국제마라톤대회를 계기로 소개된 화성지구 내 대동강맥주 가게. 고려투어스 인스타그램
달리기 참 좋은 계절이 왔습니다. 서울에선 주말마다 마라톤 대회가 개최되며 곳곳에선 교통통제가 이뤄지고, 한강변엔 새벽부터 저녁까지 러너들의 활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여행을 곁들여 해외 원정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도 꽤나 많다고 합니다.
이처럼 달리기에 진심인
한국의
러너들이, 아무리 비싼 돈을 지불하더라도 참가하지 못하는 대회가 최근 열렸습니다.
지난 6일 코로나19 확산으로 중단된 이후 6년 만에 다시 개최한 제31차 평양국제마라톤
입니다.외국인 참가자를 모집한 고려투어스에 따르면 북한을 적대국으로 삼은
미국과 한국, 그리고 2021년 대북제재 위반 북한 주민들을 미국으로 보낸 일을 계기로 북한과 단교된 말레이시아 국적을 가진 이들은 참가 신청조차 할 수 없는 대회
입니다. 정부에 따르면 이번 대회에는 중국 영국 폴란드 에티오피아 루마니아 모로코 등 46개국에서 200여 명가량의 외국인 선수가 평양을 찾은 것으로 파악됩니다.대동강 생맥주에 소시지를... SNS 감성 따라잡기
지난해 말 러시아 유튜버 '빅터'가 게시한 고려항공 햄버거 기내식. 오른쪽 아래 사진은 10여 년 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된 고려항공의 부실한 햄버거. 유튜브 채널 PoletMe Aviation Videos 캡처
북한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앞서 열린 30차례의 대회 때와 ‘차원이 다른’ 준비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사회에 무언가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듯, 제한적이기는 하나 관광상품에 포함된 식음료부터 확 바꿨습니다. 고려투어스가 꾸준히 게시한 평양 마라톤 관련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물을 살펴보니, 일단 평양으로 향하는 첫 관문인 ‘고려항공’의 기내식이 달라졌더군요. 10년 전쯤엔
채소도 없이 말라 비틀어진 패티만 끼워 넣은 ‘세계 최악의 기내식’이란 오명을 썼던 햄버거부터 바꿨습니다.
토마토와 샐러드, 치즈 정도는 곁들여진 모습입니다. 훌륭하진 않지만, 첫 여정에서부터의 망신만은 면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SNS 감성’을 공부한 듯 음식들도 꽤 먹음직스럽게 만들어놨습니다. 가장 눈길이 가는 건 ‘김정은표 신도시’ 격인
화성지구 아파트단지 근처에 새로 생긴 ‘펍(pub)’ 형태의 대동강 생맥주 가게
. 아파트도 보여주고, 그나마 해외 관광객들이 대체로 맛있다고 평가한 대동강 맥주도 입소문 내고자 하는 전략이 엿보입니다. 옥류관 평양냉면과 민물고기 회, 파스타, 소시지 구이 등 동서양 화합 식단도 SNS를 통해 소개됩니다. 대회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북한 국가대표팀이 올림픽 무대 등에서 착용하는 트레이닝복을 맞춰 입고 SNS에 자랑했습니다.이 또한 추억이니라... 북한대표팀 유니폼 입고 찰칵
6일 평양에서 열린 평양국제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이 북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고려투어스 인스타그램
북한이 이렇게 작정하고 홍보에 열을 쏟은 건 김정은의 자신감이 작용했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 분석입니다. 최근까지 북러 간 밀착이 강화되고, 핵무기 고도화 등을 통해 김정은 체제가 안정됐다고 본 것 같습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12일
“김정은은 이번 대회를 북한의 변화상을 직간접적으로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로 삼으려 했을 것”
이라며 “올해로 국가발전 5개년 계획을 마무리하고, 내년도 1월 초에 9차 당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내적으로도 한층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한 것 같다”고 봤습니다.김정은의 자신감은 대회 명칭에서도 엿보입니다.
김일성 주석의 생가 일대를 뜻하는 ‘만경대’를 지운 것
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대회까지는 ‘만경대상 국제마라손경기대회’였는데, 이번부터는 ‘평양 국제마라손경기대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지난 대회까지 명칭 앞에 꾸준히 쓰였던 ‘태양절(김일성 주석 생일)에 즈음하여’라는 표현도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 15일)을 기념해 1981년부터 매년 열린 이 대회에서 ‘태양절’ 용어를 사실상 뺀 겁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를 김일성 우상화 색채 빼기나 선대 지우기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실제 김정은은 국가적 자신감이 뚝 떨어졌을 때는 대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지난 5년여간 대회를건너 뛴 표면적 이유는 코로나19 확산이지만, 코로나19가 사실상 종식된 지난해와 재작년에도 북한은 대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코로나19는 핑계고, 도널드 트럼프 1기때던 2019년 겪은 ‘하노이 노딜’, 조 바이든 정부 체제에서의 강력한 대북 압박, 지독한 경제 악화 등 악재들로 인해 평양행 문턱을 확 높여버린 것
이라고 보는 게 좀더 합리적
이라는 얘기죠.외화벌이 맛본 北, 문호 활짝 열까?
북한 김일성 생일을 맞아 지난 6일 제31차 평양국제마라톤경기대회가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7일 보도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번 대회를 통해 북한은 앞으로도 점점 관광산업의 폭을 넓힐 것으로 보고 있지만, 여행객들에게 매력적인 관광지가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중국 상하이 출발 기준 1인당 2,200유로(약 340만 원)에 육박하는 비용을 낸 대회 참가자들에게 북한 당국은 평양의 모습을 촬영하는 데 엄격한 제한
을 뒀죠. 고려투어스가 공지한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위한 정보’를 보면, ‘현지문화 존중’을 이유로 영상 및 사진 촬영을 제한했습니다. 반드시 가이드와 동행하고, 현지인 촬영 때는 반드시 사전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지침이 골자입니다. 150㎜ 이상의 줌 렌즈 반입을 금지하고, “북한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경우 본인은 물론 가이드와 여행사에도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며 사실상 좋은 모습만 내보내라는 가이드라인도 있습니다.자국으로 복귀한 참가자들이 다소 과감한 내용의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이 또한 북한이 외국인 관광객을 받았을 때의 득실을 가늠할 잣대가 될 듯합니다. 구독자 220여만 명을 보유한 영국 유명 유튜버 해리 재거드는 이번 대회 참가 콘텐츠를 통해 “카메라 밖에서는 (북한인들과) 정말 많은 대화를 했지만, 카메라를 꺼내면 그들은 갑자기 얼어붙었다”고 전하며 외국인을 대하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을 전했고,
김주애가 북한의 차기 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는지를 묻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I’m not sure)”고 답한 안내원 모습도 고스란히
국제사회에 공개됐습니다. 북한 시민들에 대한 노출을 원치 않던 북한으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죠.오랜만에 관광 외화벌이에 나선 북한이 앞으로 얼마나 빠른 속도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할지는 두고봐야 할 일입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본격적인 외국인 관광이 재개되는 계기가 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면서 “최근 북한이 외국인 관광을 재개했다가 중단한 사례가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평양 마라톤대회를 예정대로 개최한 만큼 북한 측의 외국인 관광 재개 의지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양 교수도 ”관광객의 콘텐츠 등을 통해 상당히 비판적인 내용이 많이 나오면 개방이 움츠러들 수도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북한이) 과거로의 회귀보다 단계적으로 조금씩 문을 여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조금 더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전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