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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 휩쓸고 간 농업 현장
잿더미 위에 남겨진 농민들
경북 청송군 진보면 신촌1리의 과수 농민 조왕식씨가 폐허로 변한 저온저장고 터에 서 있다. 그의 발밑으로 출하를 앞두고 있던 사과 16여 톤이 검게 그을린 채 쌓여 있다.




검게 탄 산비탈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서 밭두렁 앞까지 다다른 불길은 벌겋게 도드라졌다. 농부는 맨손으로 땅을 긁어다 한 움큼 쥔 흙을 불꽃 위로 연신 뿌려댔다. “이제 그만하고 오라, 이제 그만하고 이리로 돌아오라!” 먼발치에 선 가족은 그를 다그쳤다. 농부는 돌아서다 말고 다시 화염을 향해 다가가 흙을 뿌리고, 수확해둔 깻단을 산불 반대편으로 내던졌다. 대지는 곧 매캐한 연기로 뒤덮였다. 산불이 닿는 곳마다 농토가 있었고, 화염 앞에 주저앉은 농민들이 있었다.

경북 의성군 신평면 교안리의 밭두렁에서 한 농민이 산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달 22일부터 일주일간, 경북 의성과 안동, 청송 일대를 덮친 산불은 농민들의 삶의 터전을 통째로 앗아갔다. 경상북도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피해를 입은 농어가는 7,030곳에 달한다. 농작물 피해는 3,700여㏊, 소실된 농업용 시설은 1,700여 채, 불에 탄 농기계는 6,200여 대에 이른다. 하지만 이조차 해당 시점을 기준으로 파악된 숫자일 뿐, 농민들이 체감하는 손실 규모는 훨씬 크다. 봄철 농번기를 맞았지만, 돌아갈 농토를 잃은 농민들을 만났다.

권오경 청송군 진보면 신촌1리장이 전소된 농업용 창고에 서 있다. 창고에 있던 각종 농기계와 올해 농사를 위해 구비해둔 각종 비료와 약품 등이 모두 불에 탔다. 그는 "한 해 농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시기에 모든 걸 잃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이 상황이 한탄스럽다"라고 토로했다.


권오경씨의 과수원 한편에 농업용 SS기(스피드 스프레이어)가 화염에 의해 녹아내려 있다.


“그날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후두두 떨어졌다. 사과나무 가지마다 터져 나왔던 꽃눈은 검게 탔고, 관개 시설은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지금 과수를 다시 심어도 4~5년은 지나야 생산성이 나오는데, 농민들이 그사이 받을 고통이 추산되기나 하나?” 권오경(65) 청송군 진보면 신촌1리장은 잿더미가 된 농자재 창고 앞에 서서 분통을 터뜨렸다. 권 이장을 따라 이동한 마을 구석구석엔 형체를 잃은 농가가 줄을 이었다.

의성 점곡면 사촌1리의 과수 농민 최기철씨가 잿더미가 된 집터에 서 있다. 이번 산불로 주택과 농업용 창고, 저온저장고, 화물차, 각종 농기계, 관개 시설 등이 소실됐다. 최씨는 "일상의, 농업의 기반을 모두 잃었다"며 "사람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고, 살아 있으면 살아지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최기철씨가 숯덩이로 변한 사과를 손바닥에 올려 보이고 있다. 그의 저장고에는 '친구들에게 나눠주려 챙겨뒀던 상태 좋은 사과' 100상자가 있었다.


숯 더미가 된 집터 앞에 선 신촌1리 주민 조왕식(53)씨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계속 헛웃음을 지었다. 조씨의 마당에는 타다 만 사과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집과 함께 저온저장고가 전소되면서 작년에 수확해 출하를 앞두고 있던 사과 16여 톤이 모두 소실됐다. “사과값이 좋은 해였다. 보험에 가입돼 있다지만, 평년 단가로 피해액을 산정하니 보상액은 현실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조씨는 말을 끝내고서 한참 동안 바닥에 나뒹구는 사과를 바라봤다.

안동 길안면 구수2리의 축산 농민 권영윤씨가 불에 타 죽은 사슴과 반려견을 묻은 자리에 앉아 있다.


화염이 불어닥친 현장에서 살아남은 엘크 사슴들이 축사 밖을 내다보고 있다. 이들 피부 곳곳에 불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다.


이번 산불로 축산 농가들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순식간에 마을 외곽까지 번진 불길은 축사를 덮쳤고, 가축을 대피시킬 겨를도 없이 모두 잃은 농가들이 속출했다. 안동 길안면 구수2리 주민 권영윤(58)씨는 산불로 500평 규모의 사슴 축사와 4,000평의 사과 과수원, 그리고 2대째 살아온 집터까지 모두 잃었다. “불이 바람을 타고 축사 뒤로 마구 날아드는데, 상황이 급박해서 울타리 문만 열어주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불길이 잡히고 다시 돌아왔을 때 3~8년생 사슴 20마리가 한자리에 죽어 있었다.” 권씨를 만났던 지난 1일 이후 열흘 남짓한 사이 사슴 2마리가 폐질환으로 추가 폐사했고, 암컷들이 네 차례 유산을 거듭했다. 생장점이 손상된 수컷들의 뿔은 기형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모두 잃어버린 심정이다”라며 “축사를 지을 때 받았던 담보대출의 이자 알림이 ‘띵동’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라고 말했다.

안동 일직면 원리의 양계 농민 김우한씨가 잿더미로 변한 축사에 서 있다. 김씨는 "35년 넘는 세월, 청춘을 다 바친 내 삶의 현장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돼 버렸다"면서 "자꾸만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손이 벌벌 떨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더욱 정성을 다해 가꿔온 공간이 몽땅 타버리고 나니 허무하고 허무하다"라고 털어놨다.


안동 일직면 평팔리의 조경수 재배 농민 조현정씨가 폐허로 변한 농원에 서 있다. 조씨는 "1986년부터 남편과 둘이서 자식 키우듯 가꿔온 농원 1만5,000평이 완전히 다 타버렸다"면서 "작년 10월 간암으로 떠난 남편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고 말했다.


영덕 영덕읍 석리의 양식 어민 최용태씨가 불타버린 양식장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번 산불로 최씨의 양어장에서는 올 4월에 출하 예정이던 광어와 도다리 약 20만 마리가 폐사했다.


정부는 주요 산불 피해지역인 경북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복구지원에 나섰다. 재산 피해를 본 주민에게 취득세와 자동차세, 등록면허세 등 지방세를 감면해주고 취득세 등 납부 기한을 연장하기로 하며, 시·군과 협의해 재산세, 주민세 감면도 추진할 방침이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엇갈린다. 의성 점곡면 사촌1리 주민 최기철(51)씨는 “정부가 피해 복구를 서두르고 있는 건 알지만, 실제 농사를 지으려면 수리 시설이나 방제 장비, 농기계 같은 기초 인프라부터 먼저 지원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연재해로 농사 기반을 잃더라도 법적으로 농민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틀 자체가 미약하다”며 “일반 근로자는 실업급여 같은 법적 지위와 그에 걸맞은 보장이 있는데 농민은 이런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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