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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그의 어머니’. [사진 국립극단]
하룻밤에 세 여자를 강간한 17세 소년과 군중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 엄마. 이보다 더한 미디어의 사냥감이 있을까. 국립극단 신작 연극 ‘그의 어머니’는 영국문학왕립학회 문학상을 받은 작가 에반 플레이시가 1990년대 실화를 모티브 삼아 2008년 쓴 작품이지만, 진작부터 미디어 마녀사냥이 정점에 달한 오늘을 예감한 모양이다.

“내 집 앞에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것들! 그냥 굶주린 짐승 같은 것들. 도대체 뭘 원하는데, 뭘 던져줘야 사라질 거냐고?” 주인공 브렌다는 시종 분노에 차 있다. 문 밖에 며칠째 진을 치고 있는 취재진 탓이다. 타블로이드를 도배하는 건 범죄를 저지른 아들이 아니라 능력있는 커리어 우먼인 엄마다.

범죄자 부모에게 공감이 쉽지는 않다. 그녀는 범죄자를 길러낸 죄인일까, 아니면 취재 경쟁에 일상을 도둑맞은 희생양일까. 그간 소년범죄물이 대체로 피해자 부모의 사적 복수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생산했다면, 최근엔 가해자 쪽을 조명하는 추세다.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는 류주연 연출의 말대로, 문화 콘텐트도 복수라는 대중적 쾌감보다 개인과 가족, 사회 문제를 다각도로 사유하는 쪽으로 확장되고 있다.

넷플릭스 전세계 1위 드라마 ‘소년의 시간’. [사진 넷플릭스]
‘원테이크 촬영’으로 화제를 모으며 넷플릭스 전 세계 1위를 몇 주째 지키고 있는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도 딱 그렇다. 13살 중학생이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잔인하게 살해했는데, 수사를 할수록 개인을 넘어 사회병리학적 문제들이 드러난다. 평범한 아이를 살인마로 돌변하게 만들고 부모의 일상까지 파괴하는 신종 온라인 문화가 섬뜩할 지경이다. 영국 총리가 이 드라마를 전국 중등학교에서 무료 시청하도록 적극 추진 중이라니, 그 심각성을 짐작할 만하다.

소년범죄 문제는 온 마을에 생각거리를 던진다. 지난해 장동건·설경구 주연의 영화 ‘보통의 가족’도 노숙자를 폭행치사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아이들에 대한 두 형제의 엇갈린 선택을 제시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올초 김강우가 출연했던 연극 ‘붉은 낙엽’은 이웃 소녀의 실종사건에 연루된 아들에 대한 불신이 파국을 부르며 가족간 신뢰의 문제를 화두에 올렸다.

김선영
대표적인 씬스틸러 김선영 배우의 7년 만의 무대 복귀작 ‘그의 어머니’는 또 다른 각으로 실존적 모성에 확대경을 댔다. 싱글맘이지만 유능한 건축 디자이너인 브렌다는 태연해 보이지만 멘탈이 붕괴 직전이다. 큰아들의 범죄로 미디어의 표적이 된 가운데 9살 둘째의 등하교를 챙기며 쇼핑몰도 지어야 한다. 미디어를 역이용해 감형을 노리자는 변호사의 조언에 따랐던 ‘희생자 코스프레’도 역풍을 맞고, 분노 게이지는 상승일로다.

주적은 미디어다. 무대는 집안만 비추고 있지만, 대문 너머 보이지 않는 세상의 존재감이 엄청나다. 집 안과 밖의 팽팽한 대치상황인 셈인데, 브렌다는 왜곡된 이미지 보도로 여론을 호도하는 황색 언론과 전쟁을 벌인다. 실감나는 전쟁을 위해 김선영 배우는 노출을 불사한다. 대문을 열어젖히고 목욕가운도 열어젖히며 “그 여자 여기 있다!”고 외칠 때 카메라 플래쉬가 폭발하는데, 대본에 없는 배우 자신의 연출이라고 한다. 이영애·이혜영의 ‘헤다 가블러’, 최민호·박성웅의 ‘랑데부’ 등 매체 스타들의 연극 출연 러시 속에 화끈하게 이름값을 하겠다는 선택으로 보인다.

김선영이 제시하는 모성은 일견 낯설다. 국민적 인기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류의 휴먼드라마에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숭고한 모성과는 딴판이다. 시종 다혈질에 공격적인 비호감 이미지인데, 문득 그가 몹시 사실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부모자식 사이란 대체로 애증관계 아닌가. 하물며 범죄자가 되어 가족 전체의 삶을 망친 아들을 곱게 대하기는 쉽지 않다. ‘부모가 가진 사랑의 한계치를 말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부모 사랑도 무한대는 아니다. 휴먼드라마가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다.

흥미로운 건 작품이 범죄 자체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오직 아들의 범죄 이후 엄마의 현재만 있다. 오고가는 등장인물들도 브렌다의 심리를 드러내는 도구일 뿐, 영 존재감이 없다. 다만 어린 둘째의 “엄마가 나쁜 엄마라서 형이 감옥에 간다”는 한마디가 우리를 각성시킨다. 브렌다가 죄인인지 희생양인지는 몰라도, ‘마녀’가 된 것은 틀림없다.

죄는 법이 심판할 테지만, 때론 법보다 여론이 더 무서운 법이다. 지금 극장 밖 세상도 그렇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를 먹잇감 삼아 포털 메인을 도배하는 스캔들이 터지고, 무분별한 보도에 소셜 미디어의 가짜뉴스까지 극한의 마녀사냥으로 치닫는 도파민의 시대. ‘그의 어머니’를 어린 아들에게까지 비난받는 마녀로 내몬 것도 도파민에 중독된 우리들이 아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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