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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트렌드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29CM X 포인트오브뷰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에 문구인이 대집결한 모습. 노혜령 인턴

얼리버드 티켓(사전 구매 할인표) 단 3일 만에 완판, 한정 수량 티켓까지 전량 조기 매진, 급기야 5~7배 높은 가격의 암표 거래-. 유명 가수의 콘서트도 역대급 스포츠 결승전도 아닙니다. 정체는 지난 2일부터 6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더플라츠홀에서 열린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였습니다. 이 행사는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29CM가 ‘어른들의 문방구’로 불리는 프리미엄 문구 편집숍 ‘포인트오브뷰’와 공동기획, 신진·프리미엄 문구 브랜드 69개를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단순한 판매나 전시가 아니라 문구 사용 방식과 즐거움을 다양한 큐레이션과 콘텐트로 보여주면서 기간 중 2만5000여명이나 되는 문구 마니아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인기 문구 크리에이터와 협업한 한정판 제품은 1시간 만에 품절되는 ‘사건’도 벌어졌고요.

최근 학령인구 감소로 추억의 문구점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소식이 종종 전해졌는데요,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종이에 직접 쓰고, 그리고, 꾸미는 아날로그의 감성은 유효한 것일까요. 필기구를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이 된 문구,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인기인지 ‘인벤타리오’ 행사를 찾아 이유를 알아봤습니다.

‘덕질’서 ‘취향 소비’로 진화…2030 홀린 문구의 매력
문구인의 성지로 불리는 연남동 빈티지 연필샵 ‘흑심’ 부스에 사람들이 몰려든 모습. 김세린 기자

행사는 박람회라 명명했지만 구성 자체가 달랐습니다. 펜·종이 등 품목별로 세션을 나누지 않았어요. 대신 주최 측은 문구를 ‘영감의 도구’로서 재해석하고 주제에 따라 공간을 기획했어요. 시장의 변화를 반영한 겁니다. 과거만 해도 디자인 문구는 ‘문덕(문구 덕후)’들만 즐기는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그 경계가 무너졌어요. 또 과거 문구 시장이 사무·학습 용품 위주로 기능성이 중시됐다면, 최근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된 개인의 수요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문구 브랜드의 헤리티지나 철학에 공감한다면 기꺼이 소장하고자 하는 고객층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게 29CM 커머스전략팀의 시장 분석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가격대가 다소 높더라도 고가의 문구가 잘 팔립니다. 실제 29CM에서 지난 1월~2월 문구·사무용품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75% 뛰었어요. 특히 고급 만년필, 볼펜, 연필 등 필기구 판매량이 2.4배 늘었고, 다이어리·플래너와 노트는 각각 64%, 43%나 뛰었죠. 소형 브랜드들도 덩달아 성장세를 보이는데요, 연남동의 작은 연필숍에서 시작해 문구 마니아들의 필수 코스가 된 필기구 브랜드 ‘흑심’과 디자인 문구 브랜드 ‘오이뮤’는 거래액이 2배 이상 뛰었어요.

인기몰이를 한 넷플릭스 화제작 ‘폭싹 속았수다’와 오이뮤의 협업 제품. 노혜령 인턴

포인트오브뷰도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데스크테리어(책상 꾸미기), 필사 등 문구를 활용한 ‘취향 소비’의 덕을 봤습니다. 지난 1월 1일부터 2월 12일까지 29CM에서 거래액이 전년 대비 7.6배 넘게 늘었다고 해요, 김재원 포인트오브뷰 대표는 “지우개나 얇은 노트와 같은 작은 문구 하나에도 이야기를 부여하거나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작업을 하는데, 이런 진심과 섬세함을 고객들이 잘 알아봐 주는 것 같다”며 “단순히 물건을 소유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물건에 담긴 이야기에 공감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라이팅힙’ 트렌드가 끌어올린 문구의 가치
'라이팅힙' 트렌드를 타고 인기가 많아진 디자인 문구. 29CM

요즘 잘 팔리는 문구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손글씨 쓰기나 필사·다꾸를 힙한 문화로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며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영향을 본 것인데요, 독서를 멋으로 여기는 ‘텍스트힙(Text Hip)’ 열풍에 이어 ‘라이팅힙(Writing hip)’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죠. 인스타그램에서 #필사 #문구 #다꾸 관련 게시물은 각각 70만개, 212만개, 468만개 이상의 게시물이 뜨는 만큼, 라이팅힙 트렌드는 문구 관련 소셜미디어(SNS) 계정과 블로그, 커뮤니티 공유 문화와 맞물려 더 큰 확산력을 얻고 있어요.

전문가들은 이런 추세를 일종의 ‘디지털 디톡스’로 봅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모든 것이 온라인·비대면으로 대체되는 세상에서 문구는 감성적 만족과 개성 표현을 할 수 있는 대상물로 확장했다”면서 “디지털 피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 된다”고 설명했어요. 교보문고, yes24 등 온·오프라인 서점들도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필사 노트와 만년필을 인기 도서, 문구 판매대에 내놓는 식으로 트렌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감각있는 색감과 디자인이 돋보이는 문구류가 진열된 모습. 노혜령 인턴

또 문구가 이제는 실용적인 도구를 넘어, 개인의 감성과 창작 욕구를 표현하는 매개체가 된 것으로도 풀이됩니다. 김재현 대표는 “사람들은 문구를 통해 일상에서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창작을 즐기는데, 이는 문구 시장의 확대를 넘어 다양한 문화가 파생되고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문구 시장에 단순 유형의 물건만 포함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등 무형의 가치와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어요.

기성 문구 브랜드도 ‘도전’…앞으로의 문구점
전통 문구 브랜드와 신진 문구 브랜드의 협업 제품들. 29CM X 포인트오브뷰

전통을 고수하던 기성 문구 브랜드도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어요. 기능성뿐 아니라 디자인과 브랜드가 중요한 요소가 된 시장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이죠. 60년 된 색연필 브랜드 ‘지구화학’이 신진 문구 브랜드 ‘키티버니포니’와 협업해 어린 시절 추억 속 색연필을 어른을 위한 한정판 제품으로 출시한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또 70년 이상 업력의 국내 대표 지우개 제조사 ‘화랑고무’는 ‘오이뮤’와 한국적 일러스트를 담아 추억의 점보 지우개를 리뉴얼한 제품을 선보이며 브랜드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했죠.

윤효원 지구화학 부장은 “전통 브랜드는 새로운 흐름을 빠르게 반영하기가 쉽지 않은데,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감도와 방향성을 빠르게 캐치하는 브랜드를 만났을 때 확실히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 같다”며 “신진 브랜드 입장에선 오랫동안 쌓아온 제작 경험과 생산 노하우가 든든한 기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간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지닌 문구 브랜드들이 개별적으로는 발전해 왔지만, 업계 전체가 각자 잘하는 부분을 존중하며 시너지를 낸 기회는 많지 않았다는 얘기죠. 그러면서 그는 “오랜 역사와 노하우를 지닌 제조사와 동시대적인 감각을 지닌 디자인 브랜드가 잘만 연결되면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어요.

60년의 업력을 지닌 지구화학이 신진 디자인 문구 브랜드를 만나 변화한 모습. 김세린 기자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전통 문구시장은 사양산업이 되었는데 앞으로는 감각적인 디자인과 브랜드 철학이 반영된 제품들이 더 살아남을 것”이라며 “소비할만한 차별화 포인트가 있어야 하고, 다이소 등 저가형 대형 채널이 성장한다는 점을 고려해 이런 상품을 눈에 띄는 곳에 공급하는 전략도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쓱쓱 써내려가는 필기의 매력과 종이의 촉감·소리를 느끼는 아날로그 감성은 문구 시장의 영원한 성장 동력이 될 거예요. 이를 발판 삼아 문구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확장되고 진화할지, 문구인들의 기대는 더 커지고 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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