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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알린 T 제로니머스,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
세리나 윌리엄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테니스 선수로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음에도 '흑인 여성'이란 이유로 많은 차별을 당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2021년 인터뷰에서 "구조적 억압과 희생양 삼기는 정신 건강에 엄청나게 부정적 영향을 미쳐요. 사람을 고립시키고, 치명적이며, 목숨까지 앗아갈 때가 너무 많아요"라고 말했다. 2022년 9월 미국 뉴욕의 빌리진 킹 국립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여자 단식 3회전에서 호주의 아일라 톰리아노비치(호주)에 패한 후 울먹이고 있다. 뉴욕=AFP 연합뉴스


미국 백인의 기대수명은 77.5세(2022년 기준), 흑인은 72.8세다. 약 40년 전인 1985년에도 백인의 기대수명은 75.3세, 흑인은 69.3세였다. 백인과 흑인의 수명 격차는 왜 수십 년간 바뀌지 않을까.

미국 사회는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흑인이 백인보다 콜라와 햄버거를 더 많이 먹고, 운동을 안 해서 수명 격차가 발생했다는 가설. 건강 악화는 오롯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시각이다. 알린 T 제로니머스 미국 미시간대 공공보건대학원 교수는 신간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에서 이 논리를 차근차근 격파해 나간다. 그는 인종 간 수명 격차의 원인을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한 개인의 건강과 기대수명이 유전적 특징이나 생활방식보다는 그 개인의 경험,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물리적 환경에 더 크게 좌우된다"고 강조한다.

아이비리그 나온 흑인은?

2023년 5월 미국 메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서 하버드대생들이 졸업장을 받고 환호하고 있다. 캠브리지=로이터 연합뉴스


개인의 건강이 그가 속한 사회경제적 여건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계급, 이로 인한 차별이 지속적으로 그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건강 악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실례로 미국 사회에선 소득과 사회적 지위가 높다하더라도 흑인일 경우 백인에 비해 빨리 사망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가설이 아니다.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인 프린스턴대 출신인 저자는 2020년, 60대 초반에 대학 동기 중 11명이 그 직전 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중 3명이 흑인 남성이었다. 병원 마취과 과장, 뉴욕 로펌 변호사, 법무부 직원으로 셋 다 사회서 '잘나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때까지 동기 전체 중 약 6%(73명)만이 사망했는데, 흑인 남성으로만 놓고 보면 사망률이 32%로 월등히 높았다. 흑인 여자 동기도 12%가 사망했는데, 백인 여성 동기에 비해 사망률이 4배 높았다. 이런 경향은 또 다른 아이비리그인 예일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사망 원인도 차이가 있었다. 백인은 대부분 사고나 에이즈에 걸려 죽은 반면, 그해 사망한 3명의 흑인 동기는 모두 암으로 사망했다. 저자는 "유색 인종인 여자와 남자 동기 중에 사망한 이들은 압도적인 비율로 심혈관질환, 자가면역질환, 암으로 죽었다"며 "사회경제적 배경이 낮은 사람이 성공을 위해 자신을 갈아넣을 때, 그 스트레스가 몸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테니스 선수 세리나 윌리엄스와 같이 세계적인 부와 명성을 가진 인물도 '흑인 여성'에 가해지는 은밀한 불평등을 피할 수 없었다. 윌리엄스는 혈전 병력이 있었고, 그래서 출산 당시 의료진에게 혈전이 생겼는지 CT 스캔을 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무시당했다. 윌리엄스가 반복해서 요청한 끝에야 폐에 박힌 혈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는 "만약 윌리엄스보다 덜 부유하고, 덜 유명하고, 덜 끈질긴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미국의 비라틴계 백인 산모 사망률은 출생아 10만 명당 19.1명(2020년 기준)인 반면, 흑인 산모 사망률은 출생아 10만 명당 55.3명으로 3배 가까이 높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 하버드대 최초의 흑인 총장이자 두 번째 여성 총장이었던 클로딘 게이. 지난해 캠퍼스에서 벌어진 반유대주의 시위 대응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퇴진 압박을 받다 결국 사임했다. 그는 사임을 알리는 공개 서한에서 "인종적 적개심에 기반한 인신공격과 위협을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스트레스가 몸을 갉아먹는다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의 저자 알린 T 제로니머스 미국 미시간대 공공보건대학원 교수. 그는 이 책으로 독일 폴링월스재단이 수여하는 올해의 과학상, 2023년 사회과학 및 인문학 분야 수상자로 선정됐다. ⓒPink Moon Photography


저자는 이를 '웨더링(Weathering)'으로 정의한다. 사전적으로 마모, 침식, 풍화를 뜻하는 웨더링은 이 책에서 인종, 민족, 종교, 계급, 성별, 성 정체성 등에 따른 차별과 편견에 의한 반복적 스트레스가 신체에 점진적으로 끼치는 생리학적 작용과 과정을 의미한다.

칼리프 브로더라는 미국 흑인 소년 가정의 비극도 웨더링의 결과로 본다. 그는 16세 때 또래 학생 책가방을 훔친 범인으로 지목돼 수감됐는데(이후 무혐의 처리됐다), 가족에게는 보석 신청에 필요한 3,000달러가 없었다. 그래서 재판 받을 날을 기다리면서 악명 높은 라이커스 아일랜드 교도소에서 3년을 지냈다. 출소 뒤 심리적, 신체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엄마는 아들이 죽은 지 16개월 만에 심장마비에 이은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책은 웨더링을 유발하는 여러 요인 중에서도 인종 차별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한국 독자에게 다소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으나, 인종 차별의 의미를 '특정 집단을 사회적으로 차별, 배제하는 모든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넓게 정의한다면 어느 사회에서나 유의미한 이야기로 읽힌다.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알린 T 제로니머스 지음·방진이 옮김·돌베개 발행·509쪽·3만1,000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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