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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 논설위원
지난 1월 검찰이 윤석열 전 대통령을 기소한 직후 공개된 공소장에서 특이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내란에 가담한 주요 피의자들의 인적사항은 대개 육군사관학교·경찰대학 등 대학 학력만 기재했다. 그런데 윤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은 출신 고교가 적혀 있고, 8회·7회·17회라고 명시됐다.

검사들이 굳이 개인정보를 추가로 기재한 건 출신 고교와 기수가 내란 혐의의 주요 단서라는 시각을 보여준다. 공소장에 명기되진 않았지만, 12회인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까지 윤 전 대통령의 충암고 선후배들은 임기 내내 돋보였다.

“사람에게 충성 않는다” 장담하더니
이제 와서 “사람은 충성심이 중요”
그래서 동문들이 서열 무시했나

김 전 장관은 경호처장에 발탁된 이후 윤 전 대통령과 나란히 다니는 모습이 계속 보도됐다. “대통령 안전을 철저히 살펴야 할 경호처장이 대통령과 붙어 다니는 모습은 부적절했다”고 전직 대통령실 관계자는 말한다. 이젠 계엄을 위한 포석으로 의심받지만, 지난해 9월 김 전 장관이 경호처장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직행한 인사도 심한 파격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경찰·소방 등의 잘못으로 159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에도 끄떡없던 이 전 장관과 함께 대통령에게 계엄을 건의할 수 있는 장관 두 자리 모두 고교 동문을 앉혔다.

정부조직법 26조(행정 각부)에 따른 서열을 보면 국방부는 여덟 번째, 행안부는 아홉 번째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와 국회 증언을 보면 윤석열 정부의 실질적 장관 서열은 달랐다. 계엄 직전 소집된 국무회의에 대해 한덕수 권한대행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장관 서열 1위인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회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의 증언이 민망하게 서열 9위의 이 전 장관은 “2년 넘게 재임하면서 국무회의에 100번 넘게 참석했는데, 이번 국무회의처럼 실질적으로 위원들끼리 열띤 토론과 의사 전달이 있었던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의 권력 지형도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총리와 부총리를 윗사람으로 생각했다면 이런 식으로 표현했을까.

장관 서열 8위인 국방부 장관이 서열 1위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을 대하는 자세도 드러났다. 최 부총리가 받은 ‘비상입법기구 쪽지’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방부 장관이 줬다고 윤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주장했다. “최 부총리에게 쪽지를 건넸느냐”는 질문에 김 전 장관은 “직접 건네지는 못하고 실무자를 통해 전달했다”고 답했다. 윤석열 정부에선 국방부 장관이 부총리에게 사람을 시켜 문건을 전달하면 그만이었던 거다. 대통령 고교 동문의 위상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력 서열을 뛰어넘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신선한 울림을 줬던 윤 전 대통령은 권력의 정점에 서자 기대를 배신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9일 서울 한남동 관저를 방문한 이철우 경북도지사에게 “사람을 쓸 때 가장 중요시 볼 것은 충성심”이라고 했다니 씁쓸하다.

법가 철학자 한비자는 일찍이 “직무의 범위를 월권하면 사형당한다”며 신하의 자세를 경고했다. 윤 전 대통령은 포고령에 담긴 ‘전공의 처단’ 문구를 김 전 장관이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전공의 부분을 왜 집어넣느냐고 물으니 ‘계고한다는 측면에서 뒀다’고 해 웃으면서 놔뒀는데 그 상황은 기억하느냐”고 하자 김 전 장관은 “기억난다”고 답했다. 국방부 장관이 교육부·보건복지부 장관 소관 업무를 함부로 다루는 걸 용인했다는 고백이다. 월권을 서슴지 않는 고교 선배를 웃으며 놔둔 관대함이 화를 초래한 사실을 깨달았을까. 지난 2월 25일 헌재 최후진술에서 윤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 이후가 “제 삶에서 가장 힘든 날들”이었다고 했다. 앞으로 닥칠 시련도 만만치 않으리라 예상한다. 정부 서열만 법대로 존중했어도 지금 윤 전 대통령은 관저에서 김건희 여사와 이삿짐을 싸는 대신 집무실에 앉아 이완규·함상훈 헌법재판관 후보자에게 당부의 말을 건네고 있었을지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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