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6·25전쟁(1950~53) 이듬해 한국에 파견돼 70년 넘게 사목 활동을 펼친 프랑스 출신 두봉 레나도(프랑스명 르레 뒤퐁·사진) 주교가 10일 선종했다. 96세. 지난 6일 뇌경색으로 긴급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2022년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해 “한국의 상황은 (전쟁 때문에) 안 좋았지만, 사람이 좋았어요”라고 말하며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다.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의 가톨릭 가정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로마 그레고리안대학 및 대학원에서 수학했고 53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 12월, 동족상잔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한국에 파견됐다. 두봉 주교는 대전 대흥동천주교회에서 10년간 보좌로 사목하며 청년부터 노년까지 신자들을 두루 살폈다. 69년 당시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고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취임해 21년간 교구를 이끌고 90년 퇴임했다.

두봉 주교가 1969년 주교가 된 것을 기념해 찍은 사진. 김수환 추기경이 곁에 있다. [연합뉴스]
두봉 주교가 중히 여긴 것은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와 “교회는 가난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이런 신조를 바탕으로 73년엔 경북 영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을 개원했다. 당시 차별이 심했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두봉 주교는 농민의 권익 보호도 중시했다. 1978년 발생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농부 오원춘씨가 “당국이 감자 경작을 권했지만 종자가 불량해 싹이 나지 않는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당국이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자 두봉 주교의 안동교구 사제단이 도움을 줬는데, 이후 오씨가 괴한들에게 납치와 폭행을 당했다. 사제단이 진상조사를 추진하면서 박정희 정권과 가톨릭이 대립하는 시국사건으로 번졌다. 당시 외교부는 두봉 주교에게 자진출국 명령까지 내릴 정도로 사건이 심각해졌다.

두봉 주교는 이후 바티칸으로 가서 “어려운 사람을 걱정하고, 힘과 희망을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설명했고,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정부가 만약 일방적으로 두봉 주교를 추방한다면 다른 사람을 안동교구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바티칸이 두봉 주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얼마 후인 79년 10·26사태로 막을 내렸다.

두봉 주교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한국인들은 내일 먹을 것이 없더라도 이웃사람이 못 먹고 있으면 음식을 나눠줬다”며 “어려운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있으면 웃을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한국의 저력”이라면서도 “서로 도와주는 면은 (요즘) 우리가 옛날 사람들만 못하다”고 각박해진 세태에 아쉬움을 표명하기도 했다.

두봉 주교는 2019년 특별귀화자로 선정돼 국적 증서를 받으면서 한국·프랑스 이중국적자가 됐다. 근래에는 성당을 겸하는 의성의 한 공소(公所)에서 생활하며 주민들을 대상으로 미사를 주례하거나 멀리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해주며 소일했다.

중앙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5295 트럼프, '금리 인하 신중' 파월에 "임기 빨리 끝나야" 랭크뉴스 2025.04.18
45294 트럼프, 관세 정책 우려한 파월 연준 의장에 “임기 빨리 끝나야” 랭크뉴스 2025.04.18
45293 시험 문제 사고팔고…참 부끄러운 스승들 랭크뉴스 2025.04.18
45292 “안정” 강조한 한덕수, 정치적 행보로 ‘국정 불안정’만 가중 랭크뉴스 2025.04.18
45291 IMF 총재 "내주 새 경제전망 눈에 띄게 하향…리세션은 아니다" 랭크뉴스 2025.04.18
45290 "매일 붙어있던 개인데"…美서 생후 7개월 아이, 핏불에 물려 사망 랭크뉴스 2025.04.18
45289 "비행기 탔다가 '고문' 당하는 줄"…中 항공사 '초슬림 좌석' 갑론을박 랭크뉴스 2025.04.18
45288 뉴욕증시, 유나이티드헬스 실적 실망감이 반등세 꺾어…하락 출발 랭크뉴스 2025.04.18
45287 [사설] 도로 3058명… 이게 환자 목숨 1년 볼모 결과라니 랭크뉴스 2025.04.18
45286 "미군 왜 경례 안하지?" 軍 좋아했지만 軍 몰랐던 '밀덕 尹' [尹의 1060일 ⑩] 랭크뉴스 2025.04.18
45285 프랑스, 과거 식민지 아이티와 과거사 공동조사위 출범 랭크뉴스 2025.04.18
45284 의대 학장들 “예외 없이 유급 결정…학생들 책임 있게 행동해야” 랭크뉴스 2025.04.18
45283 국민의힘 ‘반대 단합’에…내란·명태균 특검법 또 부결 랭크뉴스 2025.04.18
45282 금요일 낮 최고기온 29도… 전국 강풍 랭크뉴스 2025.04.18
45281 도로 ‘3058명’…정부, 의료계 이기주의에 졌다 랭크뉴스 2025.04.18
45280 트럼프, '관세 파장' 우려한 연준 의장에 "임기 빨리 끝나야" 랭크뉴스 2025.04.18
45279 경남서 어린이집 야외수업 참여한 9살 장애아 물에 빠져 숨져 랭크뉴스 2025.04.18
45278 그 많은 수돗물 누가 훔쳤나 [그림판] 랭크뉴스 2025.04.18
45277 유럽중앙은행, 6연속 금리인하 단행… 예금금리 연 2.25% 랭크뉴스 2025.04.17
45276 3표 모자라…‘내란·명태균 특검법’ 끝내 폐기 랭크뉴스 2025.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