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장제원 전 의원 발인식이 4일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백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하였고 사건이 일어난 시점부터 끝날 때까지 온전히 가해자 손에 의해 모든 것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참담할 뿐입니다.”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성폭력 혐의(준강간치상)로 수사를 받다 사망한 이후, 장 전 의원을 고소한 피해자 ㄱ씨가 최근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을 통해 밝힌 입장문 중 일부다. 사건 발생 9년 만에 어렵게 고소를 결심한 그는 “피의자는 숨졌지만 지금까지 이뤄진 수사를 바탕으로 성폭력 혐의에 대한 결과가 발표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피해자의 요청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피고, 이에 대한 전문가 의견과 제안을 모아보았다.
① “사실로 인정된 내용을 밝혀달라”
박현수 서울경찰청장 직무대리는 7일 “장제원 전 의원이 사망해 조만간 ‘공소권 없음’(공소제기 요건 결여로 재판으로 사건을 넘기지 않고 종결) 결정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찰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지 않고 종결(불송치)하면, 형사소송법에 따라 고소인 등에게 그 사유를 통보해야 한다. 피의자가 사망할 경우 통상 피해자들은 ‘피의자가 사망함에 따라 불송치한다’는 한 줄의 통보만 받게 된다. ㄱ씨 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법무법인 온세상)는 “불송치 결정문에 피해자가 어떤 내용으로 고소했고, 수사한 결과 이러이러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기재를 해주는 것과 피의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한다고만 하는 것은 차이가 매우 크다”며 “(피의자 사망으로) 공소권 없음 결정은 불가피하지만 이와 별개로 피고소인 행위가 성폭력 범죄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실체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피의자 소환 전 여러 차례 피해자를 조사했고, 피해자가 제출한 증거가 신뢰할 만한 것인지 수사와 참고인 조사를 광범위하게 했기 때문에 실체 판단을 해주는 게 진실 발견과 정의 수호를 위한 수사기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② 죽음이 앗아간 피해자 권리
피의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범죄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수사가 끝나버리면, 외려 문제를 제기한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피해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2차 피해가 일어날 우려가 크다. 지난 2021년 성폭력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 혐의로 수사를 받던 한 로펌 대표 변호사가 사망하자, 당시 피해자는 입장문을 내어 이런 고통을 토로했다. “용기를 끌어모아 정당하고 적법한 고소를 했지만 가해자의 자살로 악의에 찬 질문과 의혹 어린 시선 속에 남게 됐습니다.” 피고소인의 혐의가 인정되지 않으면 법적으로 피해자 지위를 부여받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범죄피해자 보호법에 따른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도 생긴다. 피해 사실을 확인받을 기회를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피해 회복 과정도 험난할 우려가 있는 셈이다.
고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원 단체인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건 수사 결과 발표를 촉구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③ “국민 보호도 중요한 수사 목적”
피의자 사망으로 수사를 종결하는 까닭은, 범죄 혐의가 밝혀져도 재판에 넘겨 처벌할 대상이 없기에 수사를 이어갈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경찰 내부에서도 이런 시각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다. 한 경찰은 “수사는 오로지 공소제기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라며 “자살의심자, 실종 아동을 찾고 사망자가 발생하면 타살 정황을 살피는 등 사실관계 확인과 국민 안전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다. 그렇다면 2차 피해 예방을 위해 (혐의 판단 등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경우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으로 처벌이 불가능하지만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 수사를 진행해 2020년 그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의자 방어권 행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수사를 진행하거나, 수사 결과만으로 범죄 혐의를 판단하는 건 무죄 추정 원칙에 비추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많은 게 사실이다.
④ 피해자 보호 어떻게 가능할까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 ‘피의자·피고인 사망과 진실규명’을 통해 “형사 절차상 피의자·피고인이 숨지는 경우 사건을 종결할 수밖에 없으나 피해자 지위 보장이 필요한 경우 피해자 이익을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한민경 경찰대 교수는 “현재 피의자가 사망한 경우 ‘공소권 없음’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남은 피해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규정 자체가 없다”며 “그러므로 수사 진척 정도나 사실관계가 확인된 대목에 대한 설명을 수사기관이 충분히 (검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피의자 사망으로 불송치 결정을 한 뒤 6개월간 수사 결과를 종합해 피해자 쪽에 상세히 알린 사례도 있다. 지난 2021년 5월 로펌 대표 변호사가 성폭력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숨지자 그를 고소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피해가 이어진다. 피해자 쪽은 사건을 담당한 서초경찰서에 수사 결과를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경찰은 그해 7월19일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불송치하며 피해자 쪽에 총 7장으로 이뤄진 불송치 결정문을 보냈다. 당시 피해자 대리인 이은의 변호사는 “결정문엔 기소에 대한 의견은 없었지만, 피해자가 주장한 피해 대부분이 사실로 판단하기에 충분한 내용이 담겨 있어, 이를 보도자료로 작성해 언론에 전했다”며 “(보도 뒤) 피해자에 대한 의심이 수그러들었는데 (이런 방식의) 고지가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방어 수단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민경 교수는 “피해자 사망 땐 ‘공소권 없음’ 결정을 하되 피해자가 요청할 경우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적 피해자 지위 부여를 위해) ‘피해자로 추정된다’는 식의 기록을 할 수 있게 한다거나 피해자 혹은 피의자 유족이 원하고 사실관계 규명 등 실익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수사를 지속하는 등의 방안을 우선 행정안전부령(경찰수사규칙), 경찰청훈령(범죄수사규칙)에 넣고 장기적으로 형사소송법 등 관련 법 개정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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