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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7호선 건대입구역에서 약 500m 떨어진 한 고깃집은 지난달 소주·맥줏값을 5000원에서 2000원으로 60% 낮췄다. 14년 전 가게 문을 열 때의 한 병당 3000원보다 저렴한 가격이다. 중간 유통상을 거쳐 자영업자에 판매되는 소주·맥주의 최종 도매가는 서울 기준 한 병당 약 1500원인 걸 감안하면 한 병당 마진이 기존 3500원에서 500원으로 준 셈이다. 하지만 고깃집 직원은 “이렇게 장사하지 않으면 술이 팔리지 않는다”며 “그만큼 손님이 없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8일 서울 건대입구역 부근의 한 식당이 소주, 맥주를 ″옛날 가격 그대로″ 2000원에 판매한다고 유리벽에 쓴 모습. 불경기에 소비심리가 위축되자 자영업자들은 술값을 낮춰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김성진 기자

오랜 불경기로 시민들이 지갑을 닫자 자영업자들은 술값까지 낮추며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이익을 대폭 줄여서라도 손님을 붙잡지 않으면 영업이 어렵기 때문이다. 8일 통계청 ‘3월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일반음식점에서 판매되는 소주의 물가지수(2020년 100을 기준치로 전반적인 물가의 등락을 나타내는 지수)는 115.13으로 전년 동월보다 1.3%, 맥주는 0.9% 떨어졌다. 고환율에 따른 식자재 수입 부담 상승 등으로 전체 외식 물가지수는 일 년 새 3.6% 상승했지만 소주의 경우 7개월째, 맥주는 4개월째 하락세다.



이례적 '소맥 디플레이션'
‘소맥 디플레이션’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2000년부터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 외식 소주 물가가 떨어진 건 2006년이 유일했다. 외식 맥주 물가는 한 번도 하락한 적이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던 2008년에도 소주·맥줏값은 떨어지지 않았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소주·맥주는 각종 식자재 가격과 가스비·전기료 등이 오르는 와중에도 가격을 쉽게 올릴 수 없는 식사류 대신에 자영업자들이 영업 이익을 남기는 핵심 수입원이었다”며 “가격을 떨어뜨리기 매우 조심스러운 품목”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자영업자들이 최근 들어 소주·맥줏값을 낮추는 건 그만큼 장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93.4였다. CCSI가 100보다 낮으면 소비자들이 경제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CCSI는 지난해 11월까진 100을 웃돌다가 12·3 비상계엄 사태가 터진 후 넉 달째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중순부터 소주·맥주를 반값에 판매했다는 인천의 설렁탕집 사장 안광희(58)씨는 “술 한 병 팔 때의 마진 2000원을 포기할 정도로 절박하다. 먹고 살기 정말 힘들다”고 토로했다.

8일 서울 건대입구역 부근의 한 식당이 소주, 맥주를 '1+1' 판매한다고 안내하고 있다. 김성진 기자


"정치권, 내수 활성화 대책 마련해야"
소주·맥주를 약 2000원에 판매하는 이른바 ‘불황형 포차’도 인기를 끈다. 외식 물가 상승의 영향으로 생맥주는 한 잔에 1900원, 닭 날개 한 조각은 900원에 판매하는 한 프랜차이즈 포차는 2023년 말에 영업을 시작해 현재는 전국에 180개가 넘는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식자재를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는 대형 유통업체들이 직접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며 술값을 낮추는 경우도 있다. 외식업중앙회 관계자는 “마장동 등에서 고기를 대량 유통하면서 고깃집도 직접 운영해 소주·맥줏값을 떨어뜨리는 업체가 늘고 있다”며 “이 때문에 기존 자영업자들의 가격 경쟁 압박도 심해졌다”고 전했다.

식자재값·인건비·전기료 등이 인상된 와중에 한계 상황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을 위해 내수 활성화 대책이 시급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코로나19, 계엄 등의 영향으로 소비심리가 위축된 와중에 물가마저 올라 자영업자들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라며 “정부 예산의 조기 집행 등 소비 진작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류필선 소상공인연합회 전문위원도 “자영업자들의 제 1·2 금융권 연체율이 갈수록 나빠지는 위기 상황”이라며 “정치적 불확실성이 해소된 만큼 여야가 의견 차이를 넘어 내수 활성화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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