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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신·끝> 전국서 밀려드는 도움의 손길
미얀마 난민들, 신생아 위해 식수 제공
시민들 구호·생필품 싣고 만달레이 향해
4일 미얀마 만달레이 인근 소도시 아마라푸라의 한 병원에서 산모의 어머니가 태어난 지 나흘 된 손자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기는 미얀마에 강진이 발생한 지 사흘 뒤인 지난달 31일 태어났다. 아마라푸라=허경주 특파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태어난다.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지난달 28일 미얀마를 덮친 강진으로 수천 명이 숨지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현지인들은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무너진 일상을 지탱하는 힘이 된 것은 국가도, 정치도 아닌 바로 ‘이웃’이었다.

지난 4일 찾은 미얀마 만달레이 인근 소도시 아마라푸라에 위치한 아마라푸라 종합병원. 아직 부기가 채 빠지지 않은 산모 모우예(29)가 태어난 지 나흘 된 갓난아기를 속싸개로 싸매고 있었다.

모우예는 지난해 미얀마 정부군과 저항세력 간 교전을 피해 엄마와 함께 고향 샨주(州)를 떠났다. 남편의 생사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임신한 몸을 이끌고 정처 없이 떠돌다 가까스로 아마라푸라에 정착했다.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출산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지난달 28일 낮 12시 50분. 미얀마 중부를 덮친 지진으로 어렵게 마련한 새 보금자리까지 잃었다.

지난 4일 미얀마 만달레이 인근 소도시 아마라푸라의 한 병원에서 산모 모우예(오른쪽)가 아기를 씻긴 뒤 서툰 손놀림으로 속싸개로 싸고 있다. 이 모습을 그의 어머니가 지켜보고 있다. 아마라푸라=허경주 특파원


놀란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었다. 황급히 병원으로 피신했고 내내 진통과 싸우다 지진 발생 사흘 뒤인 지난달 31일, 아기를 낳았다. 강진으로 병원 주변도 폐허가 된 데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수혈할 피도 의약품도 넉넉하지 않은, 뭐 하나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엄마가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작은 아기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며 힘차게도 울어댔다.

밤낮없이 빽빽대는 소리가 짜증 날 법도 한데, 여진 위험을 피해 병원 주차장에 마련된 야외 병상에 누워있던 환자들은 연신 미소를 보냈다.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몇 안 되는 가장 깨끗한 천과 소중한 물을 산모에게 나눠줬다.

모우예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었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앞으로 인생에 행운이 가득할 수 있는 이름을 생각 중이라고 덧붙였다. 포기하지 않는 한, 그렇게 희망은 어디서든 새로 태어날 것이다.

지난 4일 미얀마 만달레이 인근 소도시 아마라푸라의 한 병원에서 시민들이 구호물자가 담긴 봉투를 트럭에서 내려 병원 내부로 옮기고 있다. 왼쪽 아래로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원한 물품 상자도 보인다. 아마라푸라=허경주 특파원


안팎서 이어지는 도움의 손길



지난달 28일 낮 12시 50분, 재난은 예고없이 미얀마 중북부 지방을 찾아왔다. 평범했던 삶의 터전은 단 몇 분 만에 고통과 슬픔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폐허로 변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어도 ‘진짜 생존’은 이제부터다. 전기·식수 공급은 끊어지고 식량도 부족하다. 재난 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지난 1~5일 지진 피해를 입은 미얀마 만달레이와 사가잉에서 군부가 피난민을 돕거나 물품을 지원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만달레이의 한 시민은 “군인들은 구조 작업을 거들긴커녕 무장한 채 군용 트럭을 타고 다니며 길거리로 피신한 사람들을 감시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설명했다.

2일 지진으로 집을 잃은 이들을 위해 마련된 미얀마 만달레이 텐트촌에서 한 봉사자가 생필품이 담긴 박스를 꺼내 들자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만달레이=허경주 특파원


정부 부재를 메운 건 일반 시민들의 온정이다. 붕괴 피해를 입지 않은 종교 시설은 집을 잃은 이들을 위해 앞마당을 기꺼이 내놨다.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미얀마인들도 넉넉지 않은 사정 속에서도 주머니를 열었다. 현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피해 발생 지역 주민들을 돕는 방법을 묻는 이들과 이들을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이 연일 이어진다.

정식 구호 단체에 속한 것이 아닌데도, 평범한 시민들은 사비를 털어 생필품을 구매하고 차량까지 빌린 뒤 15시간 넘게 달려 피해 지역으로 향한다. 실제 취재현장에서 구호품을 나눠주기 위해 차를 세우는 사람은 대부분 마음을 모은 개인이나 소규모 지역 커뮤니티였다.

지난 3일 미얀마 사가잉 지진 피해 현장에서 자원봉사자가 주민들에게 생필품이 담긴 봉투를 건네고 있다. 사가잉=허경주 특파원


이들은 크지 않은 차량 뒷좌석에 마른 면과 과자, 이온음료, 물, 의류, 손전등 등 각종 구호품을 빼곡하게 실었다. 그리고 집을 잃고 거리로 나온 피난민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물품을 나눠줬다.

미얀마 인플루언서 조(24)와 아웅시(36) 일행도 그중 하나다. 이들은 지난달 28일부터 페이스북에서 자금 모금에 나섰다. 닷새 만에 모인 돈은 약 1만2,000달러(약 1,750만 원). 곧바로 먹거리와 분유, 기저귀, 의약품 등을 대거 구입해 검정 비닐봉투 수백 개에 나눠 담았다. 그리고 이를 중형 픽업트럭 5대 분량을 싣고는 2일 만달레이와 사가잉으로 향했다.

지난 3일 미얀마 시민들이 자신의 차량에 준비할 수 있을 만큼의 구호물자를 싣고 만달레이에서 사가잉으로 향하고 있다. 사가잉=허경주 특파원


조는 “미얀마 내부는 물론 태국 등 다른 나라에 머무는 미얀마인들까지 십시일반 돈을 보탰다”며 “넉넉하진 않지만 구호품이 당장 생존 위기에 놓인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살아갈 힘을 주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번 지진 최대 피해 지역인 만달레이와 사가잉에는 이 같은 ‘연대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시내에서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구호물품을 실은 소형 픽업트럭과 트랙터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몸을 누일 수 있는 천막처럼 크고 값진 물건이든 일회용 마스크와 상처를 막을 밴드처럼 작은 물건이든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마음을 끌어모았다. 양곤에서 왔다는 한 남성은 “모기장, 담요, 수건, 식용유 등 모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준비해 가져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4일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남서쪽으로 13㎞ 떨어진 이슬람 교인 마을 본우에에서 지진을 피해 인근 공터로 피신한 무슬림 시민들이 자원봉사자들이 기부한 천막을 설치하고 있다. 본우에=허경주 특파원


온정은 여유 있는 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피난민 텐트 촌에서 만난 여성 흘라인(27)은 “굶주리고 지친 이들이 구호 물품을 얻으려 거친 행동을 할 수 있으니 당신들이 머무는 동안 항상 안전하길 신께 기도하겠다”며 오히려 기자와 다른 구호 단체 회원들을 걱정해주기도 했다.

미얀마에서 지진으로 갈라진 땅을 잇는 것은 정부나 구조대가 아닌 평범한 이웃이었다. 그 따뜻한 손길이 하나하나 모여 무너진 삶의 자리에 다시 희망이라는 기둥이 하나둘 세워지고 있었다.

한 미얀마인 자원봉사자가 지진으로 집을 잃은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구호품 봉투. 건면과 과자, 물티슈, 마스크, 통조림, 식기류, 모자, 여성용품 등이 들어있다. 만달레이=허경주 특파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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