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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포커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월 8일(현지 시간) 'CES 2025'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SK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4월 2일 이렇게 말했다. “상대의 목을 치려면 팔을 내어준다는 각오로 도전하고 쟁취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한 인공지능(AI) 관련 토론에서 그는 “나는 상처 하나도 안 입고 남의 목을 치겠다는 이야기는 불가능한 것”이라고도 했다.

AI 전쟁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직시하는 발언이었다. 승부처가 어디서 날 것인지도 지목했다. 스피드였다. 중국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기업인의 승부사 냄새가 풍기는 발언이 주는 느낌이 최 회장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돌아보면 다른 면모가 보인다. 1998년 회장에 취임했다. 외환위기 한 복판에서 총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최 회장 중심 체제가 채 정비되지도 않은 2000년대 초 글로벌 사모펀드 소버린의 경영권 공격으로 벼랑 끝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이나 영어의 몸이 됐다. 가정사를 둘러싼 법적 분쟁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겉으로 보이는 여유 있는 모습, 대화 때 풍기는 온화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승부에 승부를 거듭한 삶이었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였다. 2011년 최 회장은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럽 재정위기가 확산되던 시절. 그룹 경영진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최 회장은 “미래를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정면으로 맞서 인수를 성사시켰다. 현재 SK그룹의 캐시카우가 됐다.

2013년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를 들고 나왔다. 느닷없는 느낌의 제안에 재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ESG란 단어가 대중화되기 한참 전이었다. 기업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소셜 밸류’의 설파자 역할을 자임했다. 2020년대 들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ESG는 누구나 아는 용어가 된다.

2019년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기업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너 혼자만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것을 바꾸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꺼지지 않는 반기업 정서와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얘기였다. 돈만 버는 기업인에서 벗어나겠다고도 했다. 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올해 초에는 한 방송사의 신년대담에 직접 출연했다. 대기업 총수가 TV토론에 직접 나간 것은 2000년대 들어 한국 재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도 그는 또 다른 화두를 던졌다. 일본과의 경제협력이다.

“세계 무역질서가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에서 일대일 ‘양자주의’ 체제로 바뀌고 있다. 우리 스스로 ‘룰 세팅’을 다시 하고 함께 연대해서 목소리를 낼 파트너국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식의 전환도 촉구했다. “세계 경제 질서가 바뀐다는 것은 마치 씨름에서 수영으로 경기의 종목과 룰이 바뀌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수영 선수로 변신하거나 물속에서 씨름을 하자고 목소리를 내 룰 세팅을 다시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최 회장은 이렇게 승부의 길목에서 피해가지 않고 정면돌파를 택했다. 올해 창립 72년을 맞은 SK호의 선장 최태원. 재계의 맏형으로 비즈니스에서는 승부사이며 사회문제에서는 해결사를 자처한 그가 던진 담론이 향후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SK AI SUMMIT 2024'에서 협력과 생태계로 만들어 가는 SK의 비전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김범준 한국경제신문 기자

비전을 제시하는 파일럿 리더를 향해


‘트럼프 스톰’으로 세계경제가 격변기를 맞고 미국발 관세정책과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더해지며 한국 경제도 흔들리고 있다. 대미 수출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의 위기감은 계속 커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도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경제 담론은 정치적 폭풍 속에 실종됐고 그사이 한국의 경쟁력은 소리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예외적 인물이 있다면 최태원 회장이다. 그는 한국 경제가 직면한 각종 난제를 풀어갈 다양한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최 회장은 삶 속에서 체득한 경험으로 거대한 풍랑이 몰아치는 위기 상황에서 해결사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

트럼프 스톰을 계기로 올해 창립 72주년을 맞은 SK그룹의 위기 극복의 역사도 재조명되고 있다. 1953년 직물회사 선경직물에서부터 시작한 SK그룹은 1980년대 에너지·화학, 1990년대 정보통신, 2010년대 반도체, 최근에는 전기차 배터리와 바이오를 신성장동력으로 삼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 최태원 회장으로 이어지는 SK그룹의 72년 역사는 위기 속에서 해법을 제시한 ‘혁신의 창업사(史)’와 다름없다.

최 회장은 창업·선대회장들로부터 물려받은 위기 극복 DNA를 바탕으로 1998년 회장 취임 이후 위기 때마다 ‘딥 체인지’(근본적 변화) 화두를 제시하며 변곡점을 만들어왔다. 최 회장은 최근 한 방송 대담에서 한국 경제가 처한 현실을 ‘삼각파도’로 정의했다.

그는 “미국 주도의 관세 인상과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 인공지능(AI)의 빠른 기술적 변화 등의 불안요소가 삼각파도로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수영과 씨름의 예를 들었다. “지금까지 씨름을 잘해왔던 선수라도 당장 수영을 해서 경쟁하라고 하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수출 주도형 경제를 바꿔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기존 경제 질서를 씨름으로, 새로운 질서를 ‘수영’에 비교하며 “피나는 노력으로 스스로 씨름 선수에서 수영 선수로 탈바꿈하거나 최소한 물속에서 씨름을 하자고 (룰을) 바꿀 수 있는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트럼프 2기 출범 등으로 국제 질서의 변화를 씨름에서 수영으로 경기 종목과 룰이 바뀌는 것에 비유해 한국이 기존 수출주도형 모델로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제시한 주요 경영 화두. 사진=SK·그래픽=송영 기자


“수출주도형 모델 한계 봉착, 국가적 AI 전략 필요”


최 회장이 난관을 헤쳐가기 위한 해결책으로 꺼낸 것은 ‘룰 체인지’ 카드다. 삼각파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으로 한·일 경제 연대, 해외 투자와 소프트파워 등 대체 모델, 해외 시민 유입, 국가 차원의 AI 전략을 꼽았다.

최 회장은 “지금 (세계경제) 룰을 결정하는 것은 1위 미국, 2위 중국, 3위 유럽연합(EU) 정도이고 우리는 그 룰을 테이크(수용)해야 하는 입장”이라며 “대한민국 혼자 국제 질서나 룰을 바꿀 만한 힘은 부족하기 때문에 같이 연대할 수 있는 파트너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일 경제연대는 기존 WTO 주도의 다자주의였던 현 무역 체제가 일대일 양자주의로 바뀌는 상황 속에서 한국과 함께 세계 시장에 목소리를 내고 ‘룰’을 바꿀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데서 나온 구상이다.

통상 압박에서 한국 경제의 숨통을 트일 만한 대안으로는 해외투자와 소프트파워를 제시했다. 최 회장은 “엔비디아가 크게 성장했을 때 엔비디아 안에 대한민국의 투자 비중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라며 투자 다각화를 역설했다.

AI 패권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가 차원의 AI 전략도 강조했다. 최 회장은 AI의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다는 점을 들며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AI를 활용해 제조 공정의 효율을 높이는 ‘제조 AI’와 국가 차원의 거대언어모델(LLM)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다. 최 회장은 “제조 AI에서 뒤처지면 제조업 전체가 무너진다. 최대 강적 중국은 제조업 사이즈가 커서 데이터가 많고 AI 능력도 우리를 능가한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사진=임형택 한국경제신문 기자

10년 전부터 서든데스 경고…‘룰 체인지’ 해법 제시


최 회장의 ‘삼각파도론’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외환위기 여파가 한창이던 1998년 최종현 선대회장의 타계로 38세에 총수에 올랐던 최 회장은 선대회장이 일군 에너지, 정보통신 기반의 SK그룹 체질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시 세계는 ‘닷컴버블’로 불리는 인터넷혁명이 몰아치고 있었고, 아날로그 기반의 통신은 초고속 디지털 통신으로 바뀌며 ‘무형의 재화’가 사업이자 수익이 되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촉발된 제로금리, 양적완화의 경제 상황,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공급망 단절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AI발 산업 재편은 최 회장이 직접 마주한 큰 파도였다. 최 회장은 앞선 파도들을 혁신으로 뛰어넘은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마주한 파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최 회장은 발상의 전환을 통한 혁신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문하며 SK그룹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방향타 역할을 해왔다. 미·중 갈등, AI 확산, 경기침체 등이 불거진 2023년에는 “빠르게, 확실히 변화하지 않으면 서든데스(돌연사) 할 수 있다”며 2016년 이후 7년 만에 서든데스를 다시 주문했다. 이후 SK그룹은 선제적인 리밸런싱에 착수해 중복 투자로 인한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더욱 민첩한 경영 여건을 만들기 위해 SK이노베이션·SK E&S의 합병, 비핵심 자산 매각 작업에 속도를 높였다.

SK하이닉스는 10년간 꾸준히 준비해온 고대역폭메모리(HBM)가 AI 확산 속 호황기를 맞으며 2024년 역대 최대인 23조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사업 규모가 작았던 CMOS 이미지센서(CIS) 분야를 매각하는 등 ‘잘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는 구조로 회사 구조를 개편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24년 4월 24일(현지 시간) 미국 실리콘밸리를 찾아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와 만났다. 사진=최태원 회장 인스타그램


HBM부터 AI DC까지…AI 밸류체인 리더십 주도


최 회장의 혁신 리더십은 AI 시대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반도체 칩 분야에서 경쟁사에 대해 승기를 잡은 AI 반도체 HBM을 필두로 AI 인프라와 AI 서비스 영역까지 ‘3대 AI 밸류체인 주도권’ 선점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지난해 매출 66조1930억원, 영업이익 23조4673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한 데에는 최 회장의 글로벌 AI 리더십과 뚝심 있는 투자가 뒷받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 회장은 SK그룹이 보유한 통신, 콘텐츠, 서비스, 반도체를 아우르는 포트폴리오의 결정체로 ‘AI 데이터센터(AI DC)’를 강조하고 있다. AI가 산업은 물론 인류 삶의 여러 영역에서 널리 쓰이면서 막대한 AI 데이터 연산을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AI DC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SK그룹의 포트폴리오가 AI DC를 구축, 운영하는 데 최적이라 보고 AI DC를 차세대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국내외 파트너십 강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AI DC의 건설(SK에코플랜트), 서버 구축에 필요한 반도체 공급(SK하이닉스), 전력 공급(SK이노베이션), 안정적인 운영(SK(주) C&C), 통신망 구축(SK텔레콤, SK브로드밴드) 등 모든 솔루션을 망라하는 장점을 앞세운 것이다.

이를 위해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TSMC 등과 반도체, 서비스, 운영 등 AI DC 관련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해 11월 ‘SK AI 서밋’에서 “SK의 AI DC 등 여러 솔루션이 (파트너사들의) 비용을 얼마나 절약해 줄 수 있는지 SK가 증명해낼 필요가 있다”며 “그럴(증명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저희와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곳과 했을 것”이라며 SK의 AI DC 역량에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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