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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전북 전주시 중앙동 웨딩거리 '이시계점'. 이창호 국수 생가라고 적힌 입간판이 서 있다. 김준희 기자


할아버지·아버지가 운영하던 ‘이시계점’
“전주가 낳은 세계 바둑 황제 이창호 국수의 생가입니다.”
지난 2일 오후 2시 30분쯤 전북 전주시 중앙동 웨딩거리 ‘이시계점’. 가게 입구에 빛바랜 입간판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입간판엔 ‘돌부처’로 불리는 이창호(50) 국수(國手)가 턱을 괴고 바둑 두는 사진과 함께 안내문이 적혀 있다. 생가를 뜻하는 영어(birth home)와 한자·일본어는 대부분 지워졌다. 이시계점은 이창호 국수의 할아버지(이화춘)·아버지(이재룡)가 2대에 걸쳐 운영하던 시계방이다.

최근 사제지간인 조훈현 9단(이병헌)과 이창호 9단(유아인)의 대결을 다룬 영화 ‘승부’가 인기를 끌면서 전주 출신 이창호 국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전주시에 따르면 이 국수는 6세 때 할아버지 어깨너머로 바둑을 처음 배웠다. 9세 때인 1984년 조훈현 국수의 서울 집에 들어가 제자가 됐다. 1986년 입단한 이 국수는 1992년 16세에 동양증권배에서 우승하며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메이저 세계대회(16명 이상 참가, 우승 상금 1억5000만원 이상) 우승만 17회로 역대 1위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대결을 대표하는 사진. 사진 속 대국은 1991년 11월 8일 열린 국수전 도전기 5국. 조훈현이 흑 6집반을 이겨 제자에게 빼앗겼던 국수 타이틀을 되찾아 왔다. 사진 한국기원


2008년 李씨 성 가진 세공업자에 임대
이시계점은 2008년부터 이평원(70)·구계숙(64·여)씨 부부가 맡아 운영 중이다. 이 국수 아버지가 지병으로 쓰러지자 가게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성을 가진 금세공업자 이씨에게 시계방을 임대했다고 한다.

이날 이시계점에서 만난 구씨는 “우린 세입자”라며 “이창호 할아버지가 창업한 가게 역사는 85년이 넘는다”고 말했다. 구씨는 “영화 개봉 소식에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를 받았다”며 “이곳에서 영화를 찍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이창호 덕에 국내 바둑 팬뿐 아니라 중국·일본 등 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부 팬은 지금은 세공장으로 쓰는 안방까지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고 ‘추억으로 간직하겠다’며 벽시계를 사 가기도 한다”며 “어떤 사람은 내가 ‘창호 엄마’인 줄 알고 ‘엄마가 젊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이시계점에 시계를 고치러 온 ‘전주 토박이’ 박옥자(61·여)씨는 “여드름이 빽빽하던 이창호는 전주의 긍지”라며 “나도 20대 초반에 (이시계점 근처) ‘설기원’에서 바둑을 배웠다"고 했다. 영화 동아리 ‘시네몽’의 회장이라는 박씨는 “영화 평이 좋아 정기 모임 때 회원들과 ‘승부’를 볼 계획”이라고 했다.

영화 '승부'에서 어린 이창호(김강훈, 오른쪽)와 바둑을 두고 있는 조훈현(이병헌). 사진 오른쪽 위에 이창호 아버지가 운영했던 '이시계점' 글씨가 보인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전주시 미래문화유산 12호로 지정된 '이시계점'. 김준희 기자
지난 2일 '이시계점'에서 구계숙(오른쪽)씨가 손님 박옥자씨와 얘기하고 있다. 구씨는 2008년부터 금세공업자인 남편 이평원씨와 함께 이창호 아버지 이재룡씨가 운영하던 가게를 이름 그대로 이어받아 영업 중이다. 김준희 기자


영암 조훈현, 신안 이세돌 기념관…이창호는 없어
조훈현·이세돌 국수의 고향인 전남 영암군·신안군엔 자치단체 주도로 두 사람 이름을 내건 바둑기념관이 있다. 반면 전주엔 ‘이창호 바둑기념관’이 없다. ‘전주시 미래문화유산 12호’로 지정된 이시계점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마저도 20여년 전 송하진 전주시장 때 세운 입간판 외에 이 국수의 물건·사진·자료·기념품은 하나도 없다.

이 탓에 “이창호 명성에 비해 생가가 너무 초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씨는 “이창호는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명사인데 정작 전주시는 ‘고장의 자랑’을 등한시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은영 전주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우범기 전주시장은 바둑을 잘 두는 데다 TV에서 유일하게 바둑 프로그램만 볼 정도로 바둑을 좋아한다”며 “조만간 이창호 생가를 방문해 보완·지원할 부분을 찾아 보겠다”고 했다.

지난달 19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승부' 언론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감독과 출연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고창석, 문정희, 이병헌, 김형주 감독, 현봉식, 조우진. 연합뉴스


전주시, 한옥마을 내 ‘이창호 기념관’ 검토
바둑계에 따르면 전주시는 수십 년 전부터 이창호 바둑기념관 건립을 추진했으나, 이 국수 반대로 무산됐다. 영화의 거리 내 옥토주차장, 전주한성호텔(옛 한성여관) 앞 전주중앙교회 등이 기념관 부지로 거론됐다가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근래엔 ‘바둑 애호가’로 알려진 우범기 현 시장이 전주 한옥마을 내 성심여중·고 땅 1만7190㎡(5200평)를 사들여 국책 사업으로 이창호 기념관을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유창희 전북자치도 정무수석과 남관우 전주시의회 의장도 기념관 건립에 적극적이라고 한다. 전북바둑협회는 이시계점을 매입해 생가를 복원할 방침이다.

1980년대 중반 입단 무렵의 이창호. 이창호는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전국 2위를 했을 정도로 어렸을 때 통통했다. 무심한 표정은 똑같다. 사진 한국기원


“이창호, 시진핑이 가장 존경하는 체육인”
이원득 전북바둑협회장은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이 국수는 500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둑기사이자 전주에서 제일 문화적 가치가 높은 인물”이라며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가장 존경하는 체육인으로 이창호를 꼽을 정도”라고 했다. 시 주석이 2015년 9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중국에서 정상회담을 할 때 이 국수 동행을 조건으로 걸었다는 게 이 회장 설명이다.

이 회장은 “1년 전 기념관 얘기를 할 때 이 국수가 웃으며 말하기에 동의하는 줄 알았는데, 최근에 물어 보니 ‘동의한다고 말한 적 없다’고 해 바로 꼬리를 내렸다”며 “한국기원 양재호 사무총장과 이 국수와 친한 바둑기사 등이 설득해 보겠다고 하는데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와 함께 전북바둑협회는 ‘2036 하계올림픽’ 개최지가 전주로 결정되면 바둑을 시범 종목으로 추진해 전북을 ‘바둑 종주 도시’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이 회장은 “전주를 대표하는 스포츠는 바둑”이라며 “지난해 전국체전에서 전체 49개 종목 중 전북도가 종합 우승을 차지한 건 바둑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전북은 한국 바둑을 만든 조남철 대국수와 이창호 국수를 배출했다”며 “조남철 부안, 이창호 전주에서 이름을 따와 ‘조부이전 세계대회(가칭)’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전주시와 재단법인 한국기원이 지난해 9월 9일 전주에너지센터에서 2024-2025 KB국민은행 바둑리그에 참가할 바둑팀 '한옥마을 전주' 창단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은 뒤 우범기 전주시장(왼쪽 넷째)과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왼쪽 셋째), 이창호 국수(왼쪽 둘째), 이원득 전북바둑협회장(맨 왼쪽), 박지원 전주시체육회장(오른쪽 셋째), 노은영 전주시 문화체육관광국장(맨 오른쪽)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전주시


전주시·완주군, 바둑팀 창단
한편, 매년 전주에선 ‘이창호배 전국아마바둑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다. 올해(9월 20일~21일) 26회째다. 전주시는 지난해 9월 프로바둑팀 ‘한옥마을 전주’를 창단했다. 백홍석·원성진·박종훈·한승주·나현 등 국내 정상급 바둑기사 5명으로 꾸린 전주팀의 총감독은 이 국수가 맡았다.

완주군도 지난해 만 50세 이상 바둑기사로 구성된 시니어 프로팀 ‘수소도시 완주’를 창단했다. 전북바둑협회장을 지낸 유희태 완주군수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이 국수가 선수로 뛴 완주팀은 지난해 11월 ‘쏘팔코사놀 레전드 바둑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정상에 올랐다.

정근영 디자이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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