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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의 고금유사

임금 진상품 더 거둬 남겨 먹은 ‘봉여’
벼슬아치들끼리 물자 공급 부탁한 ‘칭념’
권력 움켜쥔 사익 공동체, 지금도 똑같아
19세기 조선 화가 성협의 화첩 중 양반들이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갈무리

이문건(1495~1567)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17년8개월 동안 경상도 성주의 유배지에서 살아야만 했다. 귀양살이라 하지만, 무슨 감방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멀쩡한 집에서 서울에서 살던 것처럼 살았다. 또 조선 시대에 귀양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그가 귀양살이한 것이 무어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문건의 귀양살이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귀양지에서 열심히 쓴 일기 때문이다. 그 일기는 이름하여 ‘묵재일기’(默齋日記)다.

묵재일기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그중 하나를 들어보자. 이문건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한 방법이다. 상당 부분의 물자는 다른 사람의 증여로 채워지고 있다. 예컨대 1563년 5월12일 일기를 보자. 이날 호조 판서 오겸은 황모필 4자루, 양털 붓 2자루, 납약 등을 보냈고, 경상도 관찰사 심수경은 ‘봉여’(封餘)라면서 포(脯, 말린 고기) 2개, 말린 꿩 3마리, 붕어 10마리 등을 보냈다.

그런데 이날만 그런 것인가. 아니다. 묵재일기는 이런 물건들의 증여로 흘러넘친다. 판관, 목사, 군수, 현감 등등 지방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고 이문건에게 무엇인가를 보낸다. 1566년 1월을 예로 들어보자. 12일에는 성주 판관이 미역 1봉을, 3일에는 언양 현감이 생선 7마리와 전복 200마리를, 15일에는 다시 성주 판관이 과일과 밥을, 19일에는 청도 군수가 생밤 2말을, 22일에는 고령 현감이 쌀 1섬, 27일에는 인동 현감이 말린 꿩 3마리를 보냈다. 이 외에 친지로부터 받은 물건은 쓰기 귀찮을 정도로 많다.

이 벼슬아치들은 자기 개인의 물건을 이문건에게 보낸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경상도 관찰사 심수경은 포와 말린 꿩, 붕어를 보냈을 때 ‘봉여’라고 말했다. 봉여는 ‘봉상(封上)하고 남은 물건’이란 뜻이다. 곧 왕에게 어떤 물건(곧 진상품)을 봉해 올리고 남은 물건이다. 그러니까 심수경은 진상하고 남은 물건이라면서 이문건에게 보낸 것이다. 이문건은 여러 벼슬아치로부터 봉여를 22번이나 받았다. 쌀, 밀, 종이, 전복, 문어, 연어, 은어, 홍합 등등 별별 것이 다 있었다.

‘칭념’(稱念)이란 말도 묵재일기에 자주 보이는데, 본질적으로 봉상과 다를 바 없는 말이다. 칭념은 원래 불교의 용어다. 부처의 명호(名號)를 읊조리면서 무언가를 염원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 문헌에서는 보통 ‘부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안동 부사로 부임한다고 하자. 나는 그에게 안동에 사는 나의 지인에게 음식 재료나 생활용품을 줄 것을 부탁한다. 때로는 안동에 있는 나의 외거노비가 신공(身貢)을 빼먹지 않고 바치도록 감독해 줄 것을, 또는 달아난 노비를 찾아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이런 부탁이 곧 칭념인데 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16세기 조선의 관료 이문건의 ‘묵재일기’ 전문을 한글로 옮기고 주석을 단 ‘역주 묵재일기’. 민속원 제공

묵재일기에서 칭념의 구체적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1554년 8월12일의 일기다. “목사 이사필이 서울 친구들의 칭념 목록을 보내며, 쌀과 콩을 각각 1섬씩 보내왔다.” 여기서 목사는 이문건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성주의 목사다. 서울에 있는 이문건의 친구들이 이사필이 성주 목사로 부임한다는 말을 듣자 그를 찾아가 이문건에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물건 목록을 전했고, 이사필은 부임하자 그 목록을 보고 먼저 쌀과 콩을 보냈다. 이런 칭념의 방식으로 무수한 물자가 이문건에게 전해졌다.

묵재일기에는 152회의 칭념이 나온다. 여기에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실린 허다한 칭념의 예까지 고려하면 사족사회(士族社會)에서 칭념이 일상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족과 관료들은 봉여와 칭념을 통해 물자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사족이라는 것, 관료가 된다는 것은 국가 권력을 움켜쥔 그들만의 ‘봉여와 칭념의 이익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족과 관료들이 봉여와 칭념으로 건네주고 건네받았던 그 물자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봉여는 백성들로부터 200개나 300개를 거두고 그중 100개만 봉해서 바치고 나머지는 관리들이 나눠 가진 것이었다. 칭념의 물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은 국가 권력을 수단으로 백성이 생산한 것을 수탈한 것이었다.

1554년 안동의 생원 이포가 상소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면서 수령들의 과잉 수탈을 막아 달라고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문건이 받은 봉여가 그것을 입증한다. 봉여와 칭념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상응하는 행위는 조선이 종언을 고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 권력은 소수 지배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봉여와 칭념의 이익공동체’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 어디 생각나는 국가 기관이 없는가? 또 기관의 장은 없는가?


강명관 | 인문학 연구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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