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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의 ‘마지막 선택’ 그리는 김환영 작가

좌우대립 풍파 시달린 90평생 끝자락
밭 매고 곡기 끊어 죽음 주도적 준비
“그림책 만들어 어머니 방에 두고파”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을 그림책으로 옮기고 있는 김환영 작가가 지난달 19일 충남 보령 자택 작업실에서 ‘샌드(sand·모래)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어머니의 얼굴 앞에 섰다. 작가는 “인물로 그리려니 감정이 일어나고 힘들어” 어머니를 쥐의 모습(어머니는 쥐띠)으로 형상화했다. 김진수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사라락 모래가 떨어지자 어머니가 나타났다.

아들의 손이 모래를 흘려 윤곽을 잡았다. 모래를 한 줌 뿌려 면을 채웠고, 손가락을 붓처럼 밀어 선을 다듬었다. 뺨과 턱과 품이 형태를 갖췄다.

아들은 2021년 10월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이 준비한 그의 초대전에서 ‘샌드(sand) 애니메이션’을 처음 배워 공연했다. 자신에게 집중된 눈동자들을 피해 “어둠 속에 숨어서” 모래를 흘리고, 뿌리고, 다듬었다. 지난해 9월 헝가리 부다페스트국제도서전에선 페렌츠 처코(칸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상한 헝가리 출신 샌드 애니메이션 창시자)와 라이브 드로잉을 했다. 처코가 그린 그림을 이어받아 그가 모래를 흘렸다.

모래가 ‘유동적인 재료’여서 그는 좋았다. “고정되면 안심되기보다 무서웠”다. “상이 고정되면 생각도 고정”됐다. 물감이나 잉크가 이미지를 고착시킬 때 모래는 모이고 흩어지며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은 생각들을 끌어내기 수월”했다. 그가 작품을 구상할 때 연필 스케치와 샌드박스를 같이 활용하는 이유였다.

‘이 이야기’도 모래의 도움을 받았다. 장면과 장면에 다가가느라 그는 셀 수 없이 모래를 쓸고 생각을 쓸어냈다. 아들이 모래를 흘리고, 뿌리고, 다듬는 사이 맞은편 하얀 벽에 그림 하나가 상을 맺었다. 영정 사진 속 자세 그대로 어머니가 모래 테두리를 두르고 나타났다. 성경책을 읽으며 한 손으로 턱을 괸, 쥐였다.

작가가 경기도 가평에 거주하던 2005년 당시 82살이던 어머니 유재희씨의 모습. 김환영 제공

아들 김환영(66)은 민중미술을 하던 1987년 그의 생계를 걱정한 선배 화가들(이철수·박불똥)의 소개로 출판미술과 연결됐다. 한 출판사에 취직해 노조를 만들다 해고된 뒤 “리스트에 올라 취업 길이 막히면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글 위주의 어린이책 삽화 작업이 많았던 1990년대(“당시엔 마감 시간을 일주일밖에 주지 않았다”)에 그는 벌써 100권 넘는 책에 그림을 그렸다. “몇 번째 책인지 세는 게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지만 책이 한 권씩 쌓일 때마다 그의 토속적이고, 힘차고, 그러면서 섬세한 그림들도 지문을 얻었다. 권정생의 글을 그림으로 옮긴 ‘강냉이’(2015)와 ‘빼떼기’(2017)를 비롯해 ‘호랑이와 곶감’(위기철, 1992), ‘나비를 잡는 아버지’(현덕, 2001), ‘종이밥’(김중미, 2002),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임길택 엮음, 2006) 등은 독자들에게 김·환·영을 각인시켰다. 지금까지 182만부(국내외 합산)가 팔린 ‘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 2000)은 “두 딸의 학비를 보태준” 고마운 책이었다. 2009년 이탈리아 볼로냐아동도서전 주빈국 일러스트레이터들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김환영은 2010년 충남 보령으로 이주했다. “순전히 돈이 없어 찾아간 산골 중에서도 가장 싸고 허름한 집”이었다. “비워둔 지 오래돼 풀이 지붕까지 자란 집을 3년 동안 죽도록 고생해서” 고쳤다. 14년간 살았던 그 집에서 재작년 연탄가스를 마셨다. 전 주인이 도서관으로 개조하려다 포기한 시내의 이층집을 얻어 1년 전 다시 이사했다. 올 초부터 그리기 시작한 어머니는 그 산골집에서 2013년 돌아가셨다.

“스스로 결정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평생이셨어요. 삶이든 죽음이든.”

2006년 어머니의 83번째 생일날 제비들이 경기도 가평집 처마 아래 날아와 앉았다. 김환영 제공

어머니(유재희·1924년생)는 “어머니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어머니가 없는” 아이였다. 8살 때 어머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곧바로 재혼했고 아들 둘을 낳은 새어머니는 어머니를 내쫓았다. 어머니는 삼촌들의 집을 떠돌며 자랐다. 15살이 되자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실 뽑는 공장을 직접 찾아가 해방될 때까지 일했다. 22살에 이웃 마을의 가난한 남자(1983년 작고)와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았으나 둘이 죽었다. 한국전쟁 중 좌익활동을 했던 남편의 형은 징역을 살았고 동생은 총살당한 뒤 주검도 찾지 못했다. 시동생을 무덤에 숨기고 밥을 날라 먹인 죄로 어머니는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훗날 공군사관학교 입학을 꿈꿨던 김환영의 형은 연좌제로 지원 자격마저 빼앗겼다.

“환영아, 옛날에 말이다….”

앓는 속을 풀어놓을 곳 없던 어머니는 어린 김환영을 품에 안고 먼 나라의 전설처럼 그 시절을 들려줬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비밀을 다만 소곤소곤 속삭였다. 신앙을 간절하게 붙들고 살았던 어머니의 시간을 아들은 이해했다.

“첫 새가 울 때쯤 어머니는 눈을 뜨셨어요.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기도를 마치면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제 작업실을 들여다보시곤 했어요. 힘에 부쳐 교회에 나갈 수 없을 때도 하루 세 차례 혼자 예배를 드리셨지요.”

신에 의지해 살았지만 “어머니의 신앙은 주체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서도 교회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2013년 어머니가 9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아들은 어머니가 생전 다려둔 저고리를 지금까지 고인의 방에 그대로 걸어두고 있다. 김환영 제공

“그해 갑자기 밭을 매시는 거예요.”

2013년 어머니는 “특이한 행동”을 했다. 평소 밭일을 하지 않던 어머니가 2월부터 산골집에 딸린 텃밭을 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호미를 꽂아 너른 밭을 말갛게 맸다. 밭을 다 맸을 때 “담이 왔다”고 했다. 평소처럼 볶은 지네를 갈아 막걸리에 타서 마셨는데도 낫지 않았다. 여름에 구순 생일잔치를 했고 원 없이 축하받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꼽으며 김환영에게 전화를 넣어 달라고 했다. 손주들 손을 잡고 “잘 자라줘 고맙다”고 했고, 아들처럼 생각하는 목사를 불러 장례 예배를 부탁했다. 만날 사람들을 다 만난 뒤 어머니는 김환영에게 물었다.

“예쁘게 자라준 너희가 내겐 자랑이었다. 그만하면 잘 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그 말을 끝으로 어머니는 수저 들 힘이 없다며 먹기를 멈췄다. 음식을 입에 가져가면 완강히 거부했다. 가끔 물만 찾았다. 열사흘을 굶고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고 깨달았어요. 어머니가 오랜 기도와 숙원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죽음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요. 죽음은 주도적으로 삶을 정리한 어머니의 선택이었어요…. 그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그렇게 안 오시더니….”

어머니는 사후 98일째 되던 날 아들의 꿈에 처음 왔다. “건물 계단을 오르는 어머니의 몸이 뒤로 쏟아질 듯”했다. 그가 달려가 뒤에서 몸을 받쳤다. 계단 위에선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지들이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아버지, 둘째아버지, 고모와 고모부, 왕십리 큰이모 등 한 명 한 명이 또렷했다. 어머니를 보자 “왜 이제 오냐”며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어머니를 그리기 전 작가가 작업하고 있던 ‘문턱을 넘어오는 연두’의 더미북 중 한 장면. 이 연두가 마침내 어머니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김진수 선임기자

잠에서 깬 아들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꿈을 메모했다. 그 꿈이 어머니의 죽음을 그려보자고 마음먹은 계기가 됐다. 마음은 먹었지만 실제 그리기 시작한 건 12년이 더 지난 뒤였다. 연두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매셨던 산골집 텃밭에선 2월이 되면 파르스름한 연두가 올라와요. 응달진 곳인데도 며칠 지나지 않아 문 안쪽 앞마당에서도 연두가 보여요. 연두가 문턱을 넘어온 거예요.”

‘문턱을 넘어오는 연두’란 제목의 그림책을 출판사와 계약했는데 “막상 그리려니 이상하게 잘 안 풀렸”다. 김환영은 연두를 아이의 모습으로 뛰어다니게 하고 상상할 수 있는 끝까지 쫓아갔다. “연두를 따라다니며 뭐가 나올지 계속 가봤”다. 방에서 나온 연두가 시내로 들어가더니 빌딩을 덮고, 도시를 점령하고, 지구 전체를 휘감았다. 소리로도 표현해보고 악기도 동원해봤지만 책 한 권 분량을 그리고도 마땅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 연두가 어머니와 만나더군요.”

어머니는 안경을 쓰지 않고 오직 햇빛에 의지해 성경을 읽었다. 어머니를 비추던 햇빛을 연두로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들은 오래 미뤄뒀던 ‘어머니의 마지막’을 마침내 그림책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작업 순서마다 어머니와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다.

작가의 ‘할머니는 최선을 다해 죽었습니다’(가제) 스토리보드. 그는 글을 쓰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렸다. 이문영 기자

스토리보드 김환영은 글을 쓰기 전에 그림부터 그렸다. “글을 먼저 쓰면 글에 그림을 맞추느라 그리고 싶지 않은 장면을 그리는” 일이 생겼다. “몇 장 되지 않는 그림으로 시처럼 이야기하는 책이 그림책인데 한 장이라도 원치 않는 그림을 넣는 건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7개 챕터(그냥, 할머니 이야기, 울음소리, 단식, 이별, 꿈, 1주기)로 나눠 그렸다. 챕터마다 ‘손톱 그림들’(섬네일)을 스케치해 스토리보드로 묶었다. 표지엔 ‘할머니는 최선을 다해서 죽었습니다’(가제)란 제목을 써넣었다. 그랬다. 어머니는 “용감하게” 또는 “열심히” 죽었다.

원고 스토리보드를 앞에 두고 글을 썼다. 딸의 시점으로 바꿔 쓴 원고의 첫 두 문장은 ‘별일 아닌 일’을 알려주듯 무심하게 시작했다. “할머니는 13일 동안 곡기를 끊고 죽었다. 아주 오랜 기도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아빠가 말했다.” 그림에 맞춰 문장들을 구성했더니 ‘빈구석들’이 보였다. 어머니의 ‘선택’이 설득력 있게 읽히려면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사소하지만 필요한 장면들”을 채워야 했다. 평소 동시(2010년 ‘깜장꽃’이란 동시집을 냈다)처럼 간결했던 그의 그림책 원고가 어머니 이야기에선 유독 길어졌다. 어머니가 헤쳐온 고된 시간들과 병실에 입원하며 환자들에게 안부를 묻던 장면 등을 보탰다.

작가는 어머니가 밭 매는 장면 등을 더미북(가편집본)에 그려보며 그림체와 재료를 실험하고 있다. 사진 속 그림은 직접 깎아 만든 대나무펜으로 먹과 연두색 물감을 찍어 그렸다. 김진수 선임기자

더미북 아트지를 자르고 이어 붙여 더미북(가편집본)을 만들었다. 스토리보드 그림과 원고를 다듬어 한 장 한 장 앉혔다. 스토리보드와 더미북 단계는 ‘한 번에 통과’가 힘들었다. “손톱 그림들이 튼튼하면 더미북의 착오도 줄일 수 있어 작가에 따라 열 차례 이상 만들기도” 했다. 그는 보통 서너 번째 버전에서 완성했다. 그가 이번 더미북에서 색을 쓴 첫 그림은 어머니의 밭매는 장면이었다. 직접 깎아 만든 대나무 펜으로 먹과 연두색 물감을 찍어 그려봤다. 더미북은 “적절한 재료를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머금은 먹이 의도치 않게 팍 터지는” 대나무 펜은 “뜻대로 되지 않아 재미있는” 도구였다. ‘마당을 나온 암탉’도 대나무 펜으로 그렸다. 밭매는 장면을 그리면서 김환영은 비로소 알게 됐다. “어머니는 밭을 매면서 삶의 미련까지 다 매어 버리셨구나.”

쥐 스토리보드와 더미북에 그려진 어머니는 쥐였다. 김환영은 어머니와 등장인물들을 사람으로 그려보다 접었다. “너무 직접적인데다 감정이 일어나서 거리두기가 안 됐”다. 쥐로 바꿔봤다. 어머니가 쥐띠였고 쥐의 역삼각형 얼굴은 표정을 단순화하기도 좋았다. 표정에도 여백이 필요했다. “독자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대신 스스로 이입해서 읽어낼 수 있도록” 그는 때때로 주인공의 표정을 비웠다. 모래로 쥐를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김환영이 말했다.

“쥐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해요.”

작가에게 “머금은 먹이 의도치 않게 팍 터지는” 대나무 펜은 “뜻대로 되지 않아 재미있는” 도구였다. ‘마당을 나온 암탉’도 대나무 펜으로 그렸다. 김진수 선임기자

그는 집요하게 연구하는 작가였다. ‘빼떼기’(아궁이에 뛰어든 뒤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 빼딱빼딱 걷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를 그릴 때 모델로 삼을 검은 병아리를 찾아 오일장에 나갔다. 양계장에서 일하다 나온 차림새로 한 여성이 어미닭 한 마리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장이 파하고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닭의 겨드랑이에서 병아리들이 한 마리씩 기어 나왔다. 모두 8마리(이 장면을 모티브로 그림책 ‘따뜻해’가 탄생)였다. 그의 “마음이 환해졌”다. 그 닭을 데려와서 키우며 닭과 병아리의 움직임을 연구했고 그의 집은 닭의 차지(200마리)가 됐다.

죽음 그래도 그림책이었다. 어린이 독자들에겐 죽음이 부담스러운 주제일 수 있었다. ‘그래도’ 죽음 없인 삶도 없었다. 김환영은 “죽음을 무거운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각자 나이에 맞게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도 작용했다. 만화영화 ‘황금박쥐’에 푹 빠져 있던 소년 환영은 학교 앞에서 파는 ‘30원짜리 박쥐’를 한 마리 샀다. 교실에서 공부할 때도 박쥐 생각만 났다. ‘다리에 무명실을 묶어 멋지게 날려야지’ 기대했으나 박쥐는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다. 박쥐가 정말 하늘나라로 날아갔을지 궁금했던 그는 땅에 묻어준 지 며칠 안 돼 ‘파묘’를 단행했다. 박쥐의 썩은 몸 사이로 구더기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기겁한 그는 “흙을 덮어주지도 못한 채 도망치며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때부터 6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까지 죽음은 수없이 모습을 바꿔 가며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어머니가 떠나기 전 다려둔 저고리를 산골집 어머니 방에 그대로 걸어뒀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작은 탁상시계는 배터리가 다해 멈춘 뒤 시간을 맞추지 않았다. 어머니 없는 방의 시간은 그 시계처럼 오래 정지해 있었다. 아들은 가능하면 상반기에 그림을 마무리해서 올해 안엔 저고리 아래 책(출판사 사계절)을 두고 싶었다.

김환영 작가가 쥐로 형상화한 어머니를 샌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그림 김환영의 1층 작업실 구석엔 1992년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벽+프로젝트’를 위한 수첩)에 전시했던 작품이 붙어 있었다. 모델이 돼준 아내와 두 아이가 부동산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먹으로 그려져 있었다. 당시 그가 살던 서울 이웃 동네의 재개발 문제를 들여다본 그림으로 복제본이었다. 애초 원화가 없는 전시였다. “가진 자들의 독점을 깨고자 했던 민중미술 작품조차 소장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에게 “모순”이었다. 그는 원본을 복사해 벽에 붙인 벽보처럼 선보이며 삶을 지탱하는 데 미술이 필요한 사람 누구나 활용하도록 방법을 공유했다. 그림책 작가로 살며 “여기가 내 자리”라고 믿는 지금도 그는 생활하는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그림엔 관심이 없었다. “내 자리에서 만난 사람과 동물과 식물의 이야기”만으로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그의 스토리보드는 가득했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김환영은 한 선배의 말을 빌려 말한 적 있다.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작품을 줘야 합니다. 세상에 와서 처음 만나는 그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이 저를 지켜준다고 믿습니다.”

이문영 기자 [email protected]

글 김환영

내가 함께 있을게 l 볼프 에를브루흐 지음, 김경연 옮김, 웅진주니어, 2007년

주인공인 오리가 느낌이 이상해 묻는다. 너는 대체 누구냐고. ‘너’는 자기가 ‘죽음’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오랫동안 오리 곁을 따라다녔고, 아플 때를 대비해 자줏빛 튤립(꽃말 ‘영원한 사랑’)을 등 뒤에 숨기고 있다. 죽음과 하루를 보낸 오리는 이튿날 나무 위에 올라가 자신이 살던 연못을 굽어본다. 자기가 죽으면 연못이 슬프겠다고 하자 죽음이 말한다. “네가 죽으면 연못도 없어”진다고. 이 그림책은 드물게도 죽음 자체를 정면으로 다룬다.


염소 시즈카의 숙연한 하루 l 다시마 세이조 지음, 황진희 옮김, 책빛, 2022년

익숙하던 것들이 문득 새삼스럽고 낯선 날이 있다. 염소 시즈카는 메기가 숨을 쉬는 공기 방울이, 노래를 그치고 방금 죽은 매미가, 온통 새삼스럽다. 그러다 피어 보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먹어” 치웠다는 깨달음에 훌쩍훌쩍 울다가 잠이 든다. 숙연해진 시즈카에게 친구들이 다가와 “노래 부르자”고 제안한다. 박자도 제각각인 들판의 생명들은 씩씩하게 합창한다. 죽음의 그림자와 생에 관한 응원이 동시에 담겨 있다.



아버지와 딸 l 미카엘 듀독 드 빗 지음, 노경실 옮김, 새터, 2004년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이 자전거를 타고 와 강둑에서 내린다. 아버지는 딸을 홀로 남겨둔 채 배를 타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딸은 헤어졌던 자리에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가없는 기다림과 그리움 속에서 늙어버린 딸은, 물이 말라 갈대숲이 되어버린 강으로 들어가 아버지가 타고 떠난 배 안에 가만히 몸을 누인다. 시적 은유로 가득한 이 작품은 본디 9분짜리 짧은 애니메이션이나 그 여운이 무척이나 길다.



잘 가, 안녕 l 김동수 지음, 보림, 2016년

“퍽, 강아지가 트럭에 치여 죽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그림책은, 일상이 되어버린 ‘로드킬’을 그리고 있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그 시신들을 안아 리어카에 싣고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꼬리가 잘리고, 토막 나고, 바퀴에 깔려 납작해진 동물들의 사체에 밤을 새워 숨을 불어넣은 것은 작가의 온전한 공력, 즉 손바느질 덕분이다. 유머러스한 작가의 진심이 없었다면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대속(代贖)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강아지똥 l 권정생 글·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 1996년

돌이네 흰둥이가 담장 모퉁이에 똥을 눴다. 강아지똥이다. 강아지똥은 지나는 흙덩이와 참새와 암탉에게 찌꺼기만 있을 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똥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개똥이라며 놀림을 받는다. 비가 내린 어느 날, 민들레 싹이 강아지똥에게 말한다.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속으로 들어오”라고.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다”고. 자신이 온전히 죽어야만 고운 꽃이 핀다는 삶의 역설을 이 그림책은 말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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