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우성 | 매거진 ‘더파크’ 대표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mail protected]

‘선배, 저 요즘 드라마 보면서 너무 많이 울어요. 막 오열해.“

”너 몇 살이지?”

“44? 45?”

“너 그거 갱년기야.”

정말일까? 그냥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어쩌다 테스토스테론이 줄어든 걸까. <폭싹 속았수다>가 잔인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첫 회부터 편당 4~5회 정도는 꾸준히 무너지듯 울었다. 그중 1~2회는 오열이었다.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끄윽끄윽. 세상 저렇게 귀신같이 잘하는 배우들이 또 있을까. 나중엔 욕을 하면서 찾아봤다.

“임상춘이 누구야 이거… 으허엉.”

상상해봤다. 결혼 전이었어도 그렇게 울었을까.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해도 그렇게 슬펐을까. 육아에 집중하는 남자는 실제로 테스토스테론이 줄어든다던데. 그래서 배도 좀 나온다던데. 아들을 재워놓은 밤, 어둑한 집 거실에서 어쩐지 살짝 더 나온 것 같은 배를 들썩이며 거친 숨으로 우는 아저씨가 바로 나였다.

아들의 존재가 알려준 건 내가 몰랐던 감정의 영토였다. 내 안에 원래 존재하던 감정의 땅에 이제야 가로등이 켜지는 것 같았다. 애순이가 동명이를 잃을 때나 광례가 애순이를 지킬 때도 엄마랑 아들이 동시에 떠오르니 참을 도리가 있나. 평생 어렴풋이 알듯 모르듯 했던 감정들이 내 안에 또렷이 존재한다는 걸 시시각각 깨닫는 일상이었다.

호르몬까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의 폭이 넓어지고 이입의 정도가 깊어지니 소비하는 콘텐츠의 결도 달라졌다. 무척 즐겼지만 더는 볼 수 없게 된 콘텐츠도 너무 많이 생겼다. 범죄물 같은 건 이제 못 보게 됐다. 피해자가 어린이인 경우는 너무 힘들어졌다.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마지막 회사에 다닐 때였나? 범죄 다큐멘터리와 연쇄살인물과 좀비물에 심취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땐 제프리 다머, 찰스 맨슨 같은 이름들을 알고 있었다. 금지된 영역을 탐사하는 기분으로 정주행하던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 범죄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악마들이었다. 그 이름 사이사이에 회사에서 만났던 빌런들의 이름도 섞여 있었을까. 혹은 내가 빌런이 되어 그들을 한 명 한 명 지워버리고 싶었을까.

그땐 퇴근하고 돌아온 침대 위에서 <워킹데드>를 2~3편씩 연이어 보는 게 낙이었다. 이미 취한 채, 3차까지 달린 후 배가 부른 그대로 소파 위에 누운 채였다. 처음에는 좀비들이 무서웠는데 나중에는 좀비보다 사람이 서로 끔찍했던 그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좀비는 기본적으로 시체니까 비척비척 걸어 다닌다. 그건 술에 취해 집으로 들어오던 나의 보법과 닮아있었다. 머리나 목을 뒤에서 공격당해 또 한 번 죽는 모습은 회사에서 부지불식간에 당했던 공격이 뒤늦게 생각나 충격을 받은 내 모습 같았다.

생존자끼리 세를 형성하고 결국 전쟁이 되는 이야기 구조 역시 회사생활 같았다. 결국 정치, 결국 힘겨루기였다. 그 많은 암투와 질시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에피소드들이 범벅되어 있던 공간과 <워킹데드>의 배경은 어쩜 그렇게까지 똑같았는지. 좀비들은 결국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냥 끔찍하게 생겼을 뿐 때리면 죽으니까. 회사 좀비들은 때릴 수도 없었다.

범죄 다큐멘터리를 파고들었던 것도 이해를 위해서였다. 퇴사 후, 당시 사무실 분위기를 파고들다 닿은 곳에는 낯선 단어들이 즐비해 있었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나르시시스트…. 그 전까지의 나는 얼마나 평화로웠나. 정말 세상을 몰랐던 걸까. <나, 소시오패스>라는 책을 읽었던 것도 퇴사 이후였다.

이 책의 원제는 <소시오패스의 고백(Confessions of a Sociopath)>이었다. 저자의 이름은 M E 토머스. 출간 당시에는 법학 교수였고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시오패스월드닷컴’을 운영한다. 요즘은 작은 유튜브 채널에서 비슷한 처지의 소시오패스들 인터뷰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에는 저자가 소시오패스로서 살아온 인생과 소시오패스들을 만나 연구하고 깨달은 것들이 흥미롭게 적혀 있다. 그즈음 유튜브 저장 목록도 비슷했다. <소시오패스만큼 위험한 존재, 나르시시스트>는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박사가 출연했던 클립이었다. 3월30일 현재 이 영상 조회 수는 무려 218만회. 댓글 창에는 수많은 자기 고백과 경험담들이 적혀 있다. <가스라이팅 실제 예시 25문장> 같은 영상들도 함께 저장해 뒀다. 다시는 당하지 않으려고. 혹시나 어디선가 저런 말들은 안 하고 싶어서였다. 다시는 <워킹데드>처럼 황량해지고 싶지 않았다. 내내 좋은 마음을 갖고 싶었다.

당시 꽤 깊은 우울의 고랑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 역시 책을 보고 알았다. 신경외과의사 엘릭스 코브가 쓴 <우울증의 뇌과학>을 읽고 나서는 ‘우울증의 하강나선’이라는 개념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자주 걷고 가끔 뛰면서 좋은 음악들을 가까이했다. <산책하듯 가볍게>라는 책을 쓰게 된 건 어쩌면 그때의 경험 덕이었을 것이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심리학자 앤드루 솔로몬이 쓴 <한낮의 우울>은 그즈음 호기롭게 샀지만 아직 읽지 못했다. 너무 두꺼워서 엄두가 안 나는 일종의 ‘벽돌책’인데, 몸도 마음도 건강할 때 독파하고 싶은 욕심만은 아직 갖고 있다.

그 험한 단어들과 우울에서 빠져나온 후, 여가를 위해 소비하는 콘텐츠의 결은 단숨에 잔잔해졌다. 최근 목록에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나 <퍼펙트 데이즈> <미식가 친구의 미친맛집> 같은 콘텐츠들이 자리를 잡았다. 배우 박보영이 주인공인데 누가 누구를 죽이거나 그럴 리는 없잖아?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아들이 태어난 후로는 어린이 관련 범죄 기사조차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불필요할 정도로 잔인한 기사를 읽을 땐 몸이 힘들어했다. 기사 한 줄의 통증과 슬픔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그게 너무 강렬해서였다.

하지만 누군가의 분노를 투사하는 것도 콘텐츠의 의무이자 효용일까. 요즘의 분노는 <이혼숙려캠프>가 담당하고 있는 것 같다. 배우 진태현과 박하선의 정신건강이 우려되는 수준의 사례자들이 끊임없이 출연하는 프로그램. 유튜브 채널 최근 예고편의 제목은 “역대 부부 중 가장 심각한 부부?”였다. 그 분노와 스트레스를 감당하며 또 봐야 할까.

출연자들은 분명히 합의점을 찾는다. 눈물도 감동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남의 결혼생활을 관찰하는 데 소비하는 내 감정은 오로지 분노와 짜증이었으니. 어느 날은 <백억짜리 아침식사>의 성공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편을 택하기도 했다.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로 발돋움하는 오은영 박사의 진행과 윤송이 대표까지 섭외해 내는 제작진의 집념에 내 여가시간을 위탁하겠다는 뜻이다. 이건 아마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작은 콘텐츠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내 심경의 반영일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이니까.

콘텐츠는 마음의 반영이자 현상이다. 요즘 어쩐지 내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콘텐츠 리스트를 살펴보길 권하고 싶다. 그 드라마, 영화, 유튜브 콘텐츠가 자극하는 감정이 바로 당신의 감정일 것이니. 인지하고 나면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감정 안에 머물며 소비를 이어갈지. 모니터 밖에서 새로운 감정을 모색할지. 몇 년 전, 앞뒤 모르던 나의 선택은 전자였다. 지금은 여지없이 후자다. 콘텐츠는 마음이 선택하지만 행동은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엉엉 울다 산책길에 나선 것도 그래서였다. 역시 갱년기일까. 그래서 그런 걸까.

■정우성



유튜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파크’ 대표, 작가, 요가 수련자. 에세이집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단정한 실패> <산책하듯 가볍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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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 | 매거진 ‘더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