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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맘.때] 또래 아픔 함께 치유하는 ‘피어 스페셜리스트’
요즘, 당신의 마음은 어떠신가요? ‘요.맘.때’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마음 돌봄’의 시각으로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이슈마다 숨어 있는 정신건강의학적 정보를 전하고 때로는 독자들에게 공감과 힐링의 시간도 제공하고자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학교폭력 피해자인 우가은(21)씨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겨울의 어느 날 학교 옥상으로 향했다. 조금 전 발표된 중학교 배정 결과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난 3년간 자신을 괴롭힌 가해자들과 같은 중학교에 배정됐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옥 같은 나날이 계속된다는 뜻이었다. 열세 살짜리 소녀는 차라리 삶을 멈추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옥상 난간 앞에 서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난간을 붙잡고 20분쯤 망설이던 때 그나마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친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만류했다. “가은아, 그러지 마.”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친구는 심상치 않았던 우씨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우씨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우씨는 친구 덕분에 그날 목숨을 구했다.

다시 살게 됐어도 폭언과 폭행의 기억은 또렷했다. 길거리에서 가해자들을 보기라도 하면 과호흡 증상이 와 골목으로 피했다. 쌓여가는 분노에 서서히 잠식되던 그는 “이렇게 살 순 없다”고 다짐했다. 울분을 용기로 바꾸기로 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또다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고 가는 가해자에게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해달라.” 가해자는 물론 사과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씨는 그날이 “회복의 첫걸음”이었다고 말한다.

상처가 때론 성장을 부른다
최근 서울 강남구에 있는 비영리단체 멘탈헬스코리아에서 만난 김세영·우가은·이다경씨(왼쪽부터). 이들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또래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피어 스페셜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우씨는 현재 정신건강 비영리단체 ‘멘탈헬스코리아’에서 7년차 ‘피어 스페셜리스트(Peer Specialist)’로 활동하고 있다. 피어 스페셜리스트는 ‘아픔을 겪은 동료 전문가’라는 뜻으로, 또래들을 상대로 심리적 지원가로 활동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8주 동안 40시간의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정신건강 관련 지식을 쌓고, 학교에서 학생·학부모·교사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거나 공공정책 개선에 목소리를 내곤 한다.

우씨는 피어 스페셜리스트가 된 뒤 책 ‘우리의 상처는 솔직하다’를 공동 집필하고, 학교에서 강연을 하거나 국회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석하곤 했다. 얼핏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한 것 같지만 그는 “완벽한 회복은 없다. 아무리 깨끗이 치료해도 흉터는 남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언제라도 다시 무너질 수 있음을 알지만, 이미 넘어져 봤기에 조금 더 빨리 일어설 자신이 있다고 했다. 우씨는 “어둠에 잠식돼서 내 삶을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행복을 누리지 못 했을 거라는 생각에 아쉽다”며 “살길 잘했고 살아나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어 “마치 물결 모양처럼 넘어짐과 일어섬을 반복하며 회복하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슷한 이야기는 3년차 피어 스페셜리스트인 이다경(21)씨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싸는 학업 스트레스로 극심한 우울감을 겪다가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됐다. 빈도가 잦아지면서 병원에 입원도 했지만, 퇴원한 후에도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극단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문득 “이럴 바에 한 번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씨도 우씨처럼 온갖 시련을 이겨내면서 자신의 회복 탄력성이 좋아졌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는 작은 장애물에도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금방 괜찮아질 때가 많다”고 전했다. 여러 번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는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피어 스페셜리스트로 활동하며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그때 세상을 떠났더라면 이런 경험을 못 했을 거라는 생각에 아찔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피어스페셜리스트인 김세영(21)씨는 사촌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대인관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다가 가족의 보살핌 덕분에 점차 회복한 케이스인데, 그 역시도 “살아있다는 것에 참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들처럼 마음의 상처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더욱 강해지는 경험을 심리학에서는 ‘외상 후 성장’이라고 정의한다.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크게 4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그 내용은 이런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관계 재편’ ‘감사한 마음’ ‘높은 자아강도’ ‘세상의 불합리한 수용’.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들은 외상 후 성장 단계에서 인간 관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또 불운한 상황에서도 감사한 일을 찾고, 자신이 이뤄낸 것들에 자긍심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타인을 원망하는 대신 때로는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인생에 집중한다.

그럼에도 인생은 지속된다

외상과 치유, 성장에 대한 책 ‘무조건 당신 편’을 쓴 한창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고대구로병원)는 지난 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외상 후 성장을 근력 운동에 비유했다. 운동 후 근육 섬유가 미세하게 손상되고 그 손상을 회복하면서 근육이 커지는 것처럼 일상에서 겪는 역경을 잘 이겨내면 심리적으로도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반복적이고 견딜만한 스트레스는 전두엽의 관리·통제 기능을 강화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일상 속의 가벼운 역경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사회적 재난이나 사고를 경험한 경우에도 치유와 성장이 가능하다. 한 교수는 “2014년 고대안산병원에서 근무할 때 세월호 참사에서 생존한 학생들을 진료했다”며 “심리적으로 큰 트라우마였음에도 상당수의 아이가 이를 극복하고 지금은 일상생활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한 교수는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학생들도 분명히 있다”고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한 교수는 그 원인으로 ‘개인의 회복력’을 꼽았다. 한 교수에 따르면 회복력은 ‘감정 통제 능력’ ‘현실 기반의 낙관성’ ‘자기 효능감’ 등 다양한 기질적 요인으로 인해 개인마다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고 타고난 기질에 의해 회복력이 완전히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 교수는 “훈련을 통해 이런 요인들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감정 통제 능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심리상담이나 정신건강의학적 치료, 혹은 일상에서의 노력을 통해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지속적인 지지를 받는 것도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 중 하나다. 그렇기에 홀로 노력하기 어렵거나 주변에 지지기반이 전혀 없을 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정신건강의학적 치료의 목표는 회복력의 증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 교수는 “때로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치료자가 아닌 ‘러닝메이트’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며 “환자들이 자신의 속도에 맞게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환자들에게 ‘누구 좋으라고’라는 말을 자주 한다. ‘누구 좋으라고 무너져 있느냐’는 취지”라며 “본인의 의지와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 회복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지속된다”면서 “완전히 무너져 있는 것보다 역경을 극복하고 조금 더 성장한 사람이 되는 건 어떨까”라고 덧붙였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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