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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의성·영덕 산불 대피소
31일 오후 경북 의성군 의성체육관 임시대피소에서 거동이 불편한 이재민들이 쉬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경북 북부를 잿더미로 만든 초대형 산불은 초고령사회로 들어선 우리나라의 인구소멸지역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화마는 어르신들한테 더 가까웠고, 겨우 몸을 피한 이들의 삶도 위협했다.

이번 산불이 시작된 경북 의성군. 산불 이틀째인 지난 23일 낮 임시대피소가 차려진 의성실내체육관 뒤쪽에 어르신 60여명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한 요양원에 있던 어르신 가운데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전날 이곳으로 몸을 피했다고 했다. 건강이 더 좋지 않은 분들은 다른 요양시설로 모셨단다.

지난 23일 오전 경북 의성군 의성읍 의성실내체육관으로 몸을 피한 이재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어르신들은 얇은 매트 위에 누운 채 요양보호사들 도움을 받아야 했다. 살이 짓무르고 심하게는 괴사하는 욕창을 방지하기 위한 공기 순환 매트는 대피소에선 사치처럼 보였다. 휠체어에 앉아 스스로 식사하는 어르신은 극히 소수였다. 대부분은 온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변을 살피려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었다.

가림막 하나 없이 다닥다닥 붙어 누워 있는 어르신들에게는 최소한의 인권도 허락되지 않았다. 기저귀를 갈아야 할 때면 요양보호사들이 주변에서 이불을 커튼처럼 들어 올려 가리는 게 전부였다. 사방이 차단되는 구호텐트가 체육관 앞쪽에 줄지어 선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명분은 ‘관리 효율’이다. 돌봐야 하는 어르신에 비해 요양보호사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요양원 관계자는 “어르신들을 한눈에 살펴보고 돌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지난 24일 오전 경북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주민 김숙자 할머니가 면사무소로 대피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다음날인 24일 이 모습을 언급했다. 이날 오전 안동시 길안면사무소에서 주민 대피 상황을 보고받은 이 도지사는 “시설에 계신 분들을 가능하면 시설로 대피시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보고 있기 힘들다”고 말하는 이 도지사는 ‘관찰자’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25일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영덕군 주민 4천여명은 대피소 20여곳에서 지옥 같은 밤을 보냈다. 가장 많은 이재민이 모인 영덕국민체육센터에 구호텐트는 없었다. 현장에서 만난 영덕군 공무원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보급받은 텐트도 없지만, 있었더라도 설치할 수 없다고 했다. 구호텐트를 설치하면 이곳에 수용 가능한 주민은 100명 남짓에 불과하다고 했다.

26일 저녁이 되자 낮 동안 흩어졌던 주민 500여명이 체육센터로 몰렸다. 몇몇은 구호품으로 나눠준 이불을 챙겨 차로 갔다. 비교적 젊은 50대와 60대는 숙박업소로 향했다. 대피소에 남은 주민 대부분은 나이 든 어르신들이었다. 재난 발생 나흘째인 28일에야 이곳에 구호텐트가 설치됐다.

지난 26일 오후 영양군 영양읍 군민회관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주민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email protected]

대피소 어르신들은 저마다 매일 먹는 혈압약, 당뇨약을 챙기지 못해 발을 동동거렸다. 녹내장 치료를 받는 하인순(74·영덕군 축산면)씨는 불에 탄 약을 다시 구하러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야 한다며 27일 새벽부터 짐을 챙겨 대피소를 나섰다.

대피소 화장실과 샤워실도 어르신들에겐 천리 길이다. 복도에 달린 화장실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어르신들에겐 오가기가 불편한데, 나중에 개방된 영덕문화체육센터 수영장 샤워실까지는 무려 500m 거리다.

스마트폰이 익숙지 않은 어르신들에게 수시로 쏟아지는 재난문자는 닿지 않았다. 대부분 이장이 하는 마을 방송을 듣거나, 깜박 잠들었다가 사람들에게 들려 나왔다고 했다.

지난 26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한 도로에서 발견된 산불에 불탄 차량을 경찰이 조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산불로 경북에서만 모두 26명이 목숨을 잃었다. 헬기 추락 사고로 숨진 조종사를 제외하면 주민은 25명이다. 이들 나이를 보면, 50대 2명, 60대 7명, 70대 2명, 80대 13명, 90대 1명이다. 70대 이상이 16명으로 64%를 차지한다.

이들 대부분이 포탄처럼 떨어지는 불덩이를 피하지 못했다. 영덕군의 한 요양시설 어르신 4명 가운데 3명은 대피 길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들 나이는 79살, 85살, 87살이다. 직원 2명이 어르신들을 차에 태워 화염에서 벗어나던 길이었다. 불붙은 차 밖으로 직원들이 어르신 1명을 겨우 대피시켰을 때 차가 폭발했다.

의성군의 한 마을 외딴곳에서 홀로 지내던 어르신(86)은 마지막까지도 외로웠다. 그는 화마가 덮치고 사흘 뒤에야 면사무소 직원한테 발견됐다.

지난 28일 오전 산불 피해를 당한 의성군 단촌면 하화1리 마을의 건물들이 화마에 무너져 있다. 김태형 기자 [email protected]

이번 산불은 인구소멸지역에서 낭만처럼 여겨지는 ‘귀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깨뜨렸다. 어려운 도전을 한 청년, 여유로운 노후를 꿈꾼 중장년층은 폐허가 된 터전 앞에 무너졌다. 울산 울주군 삼동면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김용관(46)씨는 “인구소멸을 막는다며 여러 정책으로 귀촌을 장려하고 있지만, 이번 산불은 재난에 취약한 농어촌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농어촌으로 오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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