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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 주민들, 일상 되찾으려 안간힘
지난 25일 산불이 휩쓴 경북 영덕군 지품면 일대. 산 곳곳이 검게 탔다. 주성미 기자

“니 약은 칬나?” “약을 칠래야 전기가 와야 말이제.” “내사 마, 시간이 돼서 전 주에 쳤다.” “전기 안 꼽고 하는 거 알아봤더만 그새 많이 올랐대.”

30일 오전 경북 영덕군 이재민 임시대피소가 차려진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주민들은 미처 병충해 방제약을 뿌리지 못한 과수원을 걱정했다. 닷새 전 영덕을 휩쓴 화마에 집을 잃은 이들의 대화라고 믿기 힘들었다. 흔적도 없이 타버린 집 걱정을 뒤로하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하는 말들이다. 주민들은 자꾸만 벌겋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훔쳤다.

영덕군 지품면 삼화마을 주민 조명순(65)씨는 25일부터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 밤에는 숙박시설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마을 주민들이 모여 있는 체육센터에 온다고 했다. “방에 혼자 박혀 있으면 우울해서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래도 여기서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라도 하면 좀 나으니까.”

조씨는 14년 전 대구를 떠나 남편 고향인 삼화마을에 왔다. 시어른이 살던 곳에 집을 새로 짓고 앞마당에 좋아하는 꽃도 여럿 심었다. 그는 “평생 모은 돈으로 계획한 노후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집을 새로 지으려면 몇억이 들 텐데, 앞으로 몇년이나 더 일할 수 있겠냐”고 했다.

30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 삼화마을의 이성진·조명순씨 부부의 집이 산불에 타버렸다. 주성미 기자

조씨의 남편 이성진(66)씨는 시커먼 벽돌이 툭 건드리면 으스러질 것 같은 집 주변을 서성거렸다. 아내가 좋아하던 꽃도, 번듯하던 살림살이도 남지 않았다. 이곳은 조씨의 ‘안태고향’(태어나 자란 곳)이다. 그는 마을 앞에서 무서운 기세로 넘어오는 불바람을 봤다고 했다. “시뻘건 불이 휙 날아오면서 포탄을 아래로 툭툭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며 “여기는 불탔고, 또 저기는 멀쩡하다. 집도 밭도, 듬성듬성 이런 산불은 처음”이라고 했다.

30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 삼화마을의 이성진·조명순씨 부부의 집이 산불에 타버렸다. 주성미 기자

경북 영덕군 지품면 삼화마을의 이성진·조명순씨 부부의 집이 불타기 전 모습. 조명순씨 제공

그는 담벼락 너머 잿더미를 가리키며 “엔진톱, 예초기, 새로 산 분무기도 싹 다 타버렸다”며 “밭 옆에 농막도 타서 뭐 하나 남은 게 없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경북 영덕군 지품면 삼화마을 주민 이성진씨가 지난 25일 마을로 다가오는 산불을 촬영한 모습. 이성진씨 제공

지품면 신안마을 들머리에 사는 김란식(80)씨와 박심화(74)씨 부부는 지난 25일 몸을 피했다가 이튿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의 자전거 바퀴가 불길에 녹아 창문에 들러붙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진 유리창은 용케 버텼다. 창이 깨져 불씨가 집 안으로 날아들었다면 집도 무사하진 못했을 일이다.

이들은 전기도 수도도 끊긴 집에 돌아와 며칠 밤을 추위에 벌벌 떨며 보냈다. 박씨는 “멀쩡한 집 놔두고 왜 나가 자냐고 영감이 하도 뭐라 하니 별수 있나”라고 했다. 이틀 전 전기가 들어와 겨우 보일러를 켰다. 한동안 통신도 끊겨, 답답한 큰아들이 포항에서 날마다 들여다봤다. 박씨는 “어제(29일) 저녁 밥을 먹는데 (통신이 재개돼) 전화가 막 울리길래 어찌나 반갑던지, 밥숟가락까지 던지고 박수쳤네”라고 했다.

경북 영덕군 지품면 큰길 옆 밭에서 산불 피해 주민들이 사흘간 사과 묘목 600그루를 심었다. 주성미 기자

큰길가 황량한 밭에서 주민들은 지지대를 세우고 어린 사과나무를 심었다. 사흘째 묘목 600그루를 심었단다. 저마다 다른 마을에서 온 이들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일을 기어코 해냈다. 김진경(61·지품면 옥류리)씨는 “일이라도 해야 별생각이 안 들지 싶어서 새벽부터 나왔다. 수십년을 해온 일인데 영 엉망”이라고 했다.

초토화된 바닷가 영덕읍 노물리에서도 주민들은 어둠이 가시기 전 새벽부터 바다에 배를 띄웠다. 등 뒤가 새카맣게 탄 횟집 앞마당에서 몇몇은 갓 잡은 가자미를 분주하게 손질했다.

이번 산불로 경북 영덕군에서만 주민 9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주택 1246채가 불에 탔고, 대피한 주민 5132명 중 726명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영덕군은 전기와 물, 통신이 끊겼는데, 일부 지역은 아직도 복구되지 않고 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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