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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웬만해선 말섞지 않는 [우리 도시]에서 타인에게 말걸기
| 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오늘도 한마디도 안 했네.’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으며 깨달았다. 오늘 어디를 갔더라. 새로 생긴 국밥집에서 경상도식 소고기국밥을 먹고, 마트에 가서 버섯과 양배추를 사고, 카페에 들러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내가 간 모든 곳에 키오스크가 있었다. 단말기의 매끈한 화면을 들여다보며 국밥을 주문하고, 마트에선 셀프 계산을 했다. 카페에서도 키오스크를 썼고, 버스는 카드를 태그하면 끝난다.

요즘 도시에서는 원한다면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가게를 들어갈 때 ‘안녕하세요’, 물건을 받을 때 ‘감사합니다’ 정도는 하겠지만 그걸 제외하면 대화랄 것은 전혀 없다. 옛날에는 길에서 붙잡고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나 시간을 물어보는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요즘은 없다. 휴대폰 맵에 위치를 넣으면 뭘 타고 어디서 내려서 어떻게 가는지 내비가 다 알려준다. 이러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끼고 다닌다. 우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밥을 먹고 물건을 사고 길을 헤매지 않고 집에 돌아올 수 있다.

이게 좋은 걸까? 모르겠다. 어릴 때 내가 그리던 세상인 건 확실하다. 나는 원래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과 얘기하기 싫어서 택시도 안 타고, 미용실도 잘 안 갔다. 카페나 식당에서도 주인이 조금만 친밀하게 말을 붙이면 다음부터 거기에 발걸음을 끊었다.

이러는 게 나뿐만이 아니니 이제는 택시를 타거나 미용실에 가도 사람들이 말을 안 시킨다.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사람과 대화하는 일은 드물다. 나는 도시와 사람들을 관찰하지만 멀리서 의도를 짐작할 뿐, 그 안으로 뛰어들진 않는다. 이대로 사는 것도 괜찮을까.

하루 종일 말 안 해도 문제없는 ‘키오스크 시대’

닭강정 가게 사장님께 수줍게 전한 “맛있어서 또 왔어요”

“고마워요” 환한 미소와 행복한 목소리로 돌아와 가슴 찡




아니, 안 괜찮다. 이렇게 소극적인 관찰을 하다 보니 글 쓸 거리가 없다. 경향신문에 연재도 하고 있는데 기사에 쓸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부족하다. 결국 직업적으로 ‘스몰토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도가 이미 불순하다.

자, 지금부터 나도 스몰토크라는 것을 해보자. 이렇게 결심한다고 내 마음대로 당장 되는 것이 아니다. 스몰토크는 쉽지 않다. 미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우 아 유?”를 묻고 금방 아는 사이처럼 대화한다. 중국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나에게도 중국어로 이것저것 물어본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웬만해선 서로 말을 걸지 않는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뭐 물어보려고 “저기 죄송한데요”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이비 단체들이 앙케트나 길 물어보는 핑계로 포교하는 일이 많아진 다음 더 심해진 현상이다.)

기죽지 말자. 배움의 기초는 모방이라고 했다. 일단 먼저 남들이 스몰토크하는 것을 관찰하는 게 먼저다.

어린이들은 스몰토크를 잘하는 편이다. 나이가 비슷하면 “그게 뭐야?” 하는 것으로도 말을 잘 붙인다. (물론 유교 사회 일원들답게 나이를 금방 따져 위아래를 가린다) 이에 반해 폐쇄성이 강해지는 청소년들부터는 스몰토크가 줄어들어 20, 30, 40대는 모르는 사람과 아예 말을 섞지 않는다. 이들이 모르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것은 “당근이세요?” 할 때 정도다.

반면 50대 이상 세대, 특히 60대 이상부터는 모르는 사람과도 대화를 스스럼없이 하는 게 보통이다. 공원에서 나물을 캐고 있는 백발의 할머니에게 지나가던 다른 할머니가 반존대로 툭 말을 던진다. “아줌마, 거기 뭐 캐시는겨?” 대답하는 쪽도 놀라지 않는다. “아, 이거 하고초인데 된장에 지져 먹으면 맛있다길래” 목적을 이루었으니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는다. “아~” 대답도 없이 대화는 종료되고 질문자는 떠나간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주고받고 헤어지는 것이 미국 사람 못지않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어쩌면 어릴 때 텔레비전이 있던 세대와 아닌 세대의 차이가 있으려나? 예전엔 새로운 소식과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집 안에서 알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으니,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했다. 지도 앱 같은 게 어디 있나, 모르는 곳에 가려면 최소 대여섯 명이 넘는 사람에게 말을 붙여야 했다. 시계가 없으면 시계 찬 사람에게 몇 시인지 물어야 하고, 버스를 탈 때도 내가 타려는 게 맞는지 버스정류장 옆 노점에서 껌 한 통을 사며 물어봐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어르신들은 스몰토크가 자연스레 몸에 붙은 건 아닐까. 스몰토크에 있어 어르신들은 대선배다. 존경심이 피어오른다. 지하철에서도 보면 젊은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만 보고 있는데 경로석에서는 “할아버지, 어여 앉으세요, 넘어져” “허허, 내가 스무살밖에 안 됐는디 이런 데 앉아도 되나~?” 하하호호 농담과 이야기가 잘도 오간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식 자랑을 하기도 하고, 정치 토론을 하며 목청을 높이기도 한다.

지역 차이도 있다고 한다. 일단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스몰토크는 좀 더 흔해진다. 특히 부산에서는 젊은 사람들도 스몰토크를 많이 한다고 한다. 마트에서 새로 나온 과자를 들고 있으면 뒤로 지나가며 “그거 별로예요” 하는 사람이 있고, 식당 앞에 줄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여기 맛있어요?” 하고 물어본다. 지하철에 타서도 어느 한 사람이 “이거 서면역 가요?” 하면 서너 명이 서로 가르쳐주려고 난리다. (그래서 부산 사람들은 서울에 올라가면 스몰토크를 하지 않는 문화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한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더니 이젠 베어가기는커녕 남이 코가 있든 말든 관심도 없는 차가운 서울. 하필 여기서 스몰토크를 도전하다니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다들 너무 바빠 보여서, 또는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아무리 다녀봐도 말 붙일 핑계가 없다. 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그러던 어느 날 마포구 망원시장에 갔다. 관광지로 유명한 시장답게 대형 관광버스가 서고 각국의 외국인들이 줄지어 내린다. 가이드가 유창한 영어로 ‘떡꼬치’를 설명한다. 데이트하는 커플은 고추튀김을 포장해 맥주를 들고 한강공원으로 향한다. 빨간 케첩소스가 줄줄 흐르는 핫바를 들고 멍때리는 청소년, 방금 포장한 돈가스의 냄새를 맡아보는 남자, “잠시만 지나갈게요~.” 배달할 짐을 싣고 부르릉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 혼란하다, 혼란해. 온갖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걷기도 힘들다. 그 와중에도 동네 주민들은 꿋꿋하게 오이를 사고 젓갈을 사고 두부를 산다.

“채소가 싸요, 싸! 대파 한 단에 이천워언~!” 주인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에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누군가 “어휴, 시들한 거 아냐?” 하는 혼잣말에 “보세요, 밭에서 방금 뽑아온 거 같지” 하면서 주인이 싱싱한 대파를 내민다. 또 어떤 이는 청경채를 집어 들고 “이걸 뭘로 해먹나…” 하며 혼잣말을 하고, 옆의 아주머니가 “샤부샤부해도 되고, 굴소스 넣고 볶아봐요, 맛있지” 하며 살아있는 검색 결과를 제공한다.

헛, 바로 이거다. 스몰토크의 시작은 혼잣말이었다! 일부러 말할 거리를 지어내서 질문을 하거나 말을 걸 필요가 없었다. 그냥 혼자서 “단감이 좀 단단한 게 없나…” 하면 “저쪽 청과물상에 파는 거 봤어요” 하는 말이 어디서 훅 들어온다. 설령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혼잣말이었으니 체면이 상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까 버스정류장에서 누군가 “히익, 버스 20분 뒤에 온다고?” 하는 혼잣말에 “방금 갔어요” 하고 대꾸해줬던 게 생각난다. 이래서 어르신들이 자꾸 혼잣말을 하는 걸까?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식을 알고 나니 용기가 생긴다. 두근두근, 이참에 내가 좋아하는 닭강정을 사러 갔다. 유명한 집이라 한참 줄을 서서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어서 오세요! 뭐 드릴까요?” 분위기는 떠들썩하고 사장님도 활발해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1만원에 두 가지 맛을 고를 수 있다. 오리지널을 하나 고르고 나니 나머지 하나는 뭘 할지를 모르겠다. 매운 걸 고를까 말까. 그래, 이럴 때 혼잣말 스킬을 쓰는 거다!

“…많이 맵나….”

매운맛을 가리키며 혼잣말 아닌 어색한 혼잣말을 하자 사장님이 바로

“아니, 맛있게 매워요~. 내가 맵찔이인데 이건 잘 먹어” 하고 넉살 좋게 응수해준다. 용기가 조금 생긴다.

“그럼 매운맛은 5알만 넣어주세요.”

그러자 주인분이 씨익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후회할걸? 후회할걸?”

생각지도 못한 전략이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ㅋㅋㅋ 걍 매운맛 반, 오리지널 반 주세요.”

너무 자연스러운 대화다. 여기서 한마디를 더 해볼까, 말까. 에잇, 말해보자.

“여기 전에 먹어보고 넘 맛있어서 또 왔어요” 하고 말하자 순간 사장님의 눈썹 끝부분이 아래로 쓱 내려가고 눈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얼굴이 불을 켠 것처럼 밝아진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나에게 크게 외친다.

“…고마워요~~!”

누가 들어도 행복한 목소리다. 나도 대답한다.

“많이 파세요!”

성공이다. 그런데 해냈다는 성취감 대신 왠지 가슴이 찡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이 바로 전달된 것을 느꼈다. 기쁨과 보람이 그 사람의 얼굴을 환하게 만드는 것을 목격했다.

그동안 이런 게 조금은 그리웠던 걸까? 화면에서 메뉴를 선택하고, 카드를 집어넣고, 알림이 오면 가서 포장된 음식을 받아오는 무미건조한 과정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게임 용어가 익숙한 젊은 세대가 사용하는 말 중에 ‘NPC’가 있다. non-player character의 준말인데 원래 게임 속에서 사람이 직접 조작하지 않는 캐릭터를 말한다. NPC는 게임의 일부로서 항상 제자리에 있고 같은 말을 한다. 부여된 설정은 있지만 인격은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을 때 ‘사람을 NPC로 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게임 속에는 NPC가 있지만 실제 세상은 게임이 아니고 그 누구도 NPC가 아니다. 내가 이 사회에서 접하는 모든 사람은 실제로 존재한다. 나는 거기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여기 분명히 속해있다. 이런 믿음은 바로 스몰토크의 효능이다.

확신하건대, 이 닭강정은 분명히 더 맛있을 것이다.

■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저서로는 <이다의 자연관찰일기> <내 손으로 치앙마이><걸스토크><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등이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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