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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의 노동]②'무늬만 프리' 방송작가 上
"사회 변화 만들어내는 이 일 사랑하지만..."
정작 작가는 최저임금 박봉에 체불도 왕왕
연차·병가 없어 "응급실 갔다가도 출근했다"
PD 맘대로 월급날 달라지는 방송사도 있어

편집자주

전문적이지 않은 직업이 있을까요? 평범하고도 특별한 우리 주변의 직장·일·노동. 그에 담긴 가치, 기쁨과 슬픔을 전합니다.
한국일보는 14일 방송작가 3명을 만났다. 방송국에 매여 근로자처럼 일하는 '무늬만 프리랜서' 경험에 비추어 일하는 사람으로서 바라는 게 있는지 물었다. 왕태석 선임기자


일하는 사람으로서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플 때 쉬고 싶다' '쉬운 해고 안 당하고 싶다' '사람이고 싶다, 인간 대접받고 싶다'는 대답
이 돌아왔다. 10년째, 20년째 '방송국 밥' 먹으며 험한 업계에서 버티고 있는 베테랑 방송작가 3명의 말이다.

근로자라면 응당 보장받았을 기본권이다. 근로기준법에는 연 15일 유급휴가 지급(제60조), 부당해고 금지(제23조), 직장 내 괴롭힘 금지(제76조2)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그러나 방송작가들은 '근로자처럼' 일하더라도 적용 예외다. 99.99%는 프리랜서 계약을 맺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계약서도 못 쓰고 일하는 방송작가가 허다하다.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세 작가는 "이 일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엔딩크레디트에 본인의 이름 석 자가 담겼던 순간, 내가 쓴 원고가 출연진의 목소리를 타고 전파로 흘러나오던 순간, 그늘진 곳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발굴해 사회 변화를 만들어낼 때의 뿌듯함을 잊을 수 없다고.

그게 아니고서야 저임금과 임금체불, 직장 갑질을 수차례 겪고도 여즉 이 업계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방송국 '어느 높으신 분' 말 한마디에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는 경험을 수차례 하고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을 리 없다고, 그들은 웃고 울며 말했다. "저도 세 번 탈주했다가 다시 돌아온 경우예요. 20대 후반, 첫 탈주 때는 석 달치 임금의 절반을 떼였죠."(박현영(가명) 작가)

그들의 말마따나 '해고가 프리한' 것이 프리랜서 작가들의 현실이라, 김은진 MBC 차별없는노조 위원장 외에 다른 두 작가는 얼굴과 실명 비공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 작가만 유일하게 현재 무기계약직 신분이다. 이들은 훗날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인터뷰에 나선다고 했다.

계약서도 못 쓰고 일하는 방송작가 37%

게티이미지뱅크


방송계는 '프리랜서 천국'이다. 정규직 PD와 기자를 제외하면 작가, AD, 리포터, 캐스터 등 비정규직·프리랜서가 기본값이다.
2020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실태조사를 보면, 방송산업 노동자 42%가 비정규직·프리랜서였다. 고용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2021'을 봐도 지상파 3사 시사교양국 보도국 내 정규직은 40%, 나머지 프리랜서·파견직·계약직 등이 60%였다.


박현영(이하 박)="작가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정규직으로 일해 본 적이 없어요. 계약서 안 쓰고 일한 적도 많아요. 애초에 급여도 못 묻고 시작할 때가 많았고, 들었던 금액보다 적게 받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요."

김은진(이하 김)="(2017년 12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방송작가 표준계약서를 발표한 후에야 업계 문화가 달라졌지, 그전에는 급여 물어보는 것도 터부시했어요. 말이 안 되죠. 요즘에도 채용 공고에 급여 명시하는 곳, 안 하는 곳 반반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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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구두계약만으로 일하는 문화는 2025년 현재도 여전하다. 그나마 지상파나 종편처럼 정부 인허가를 받는 곳은 계약서라도 쓰지만, 외주 프로덕션이나 유튜브 등은 "계약서 안 쓰는 곳이 수두룩 빽빽"하다는 것이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지난해 11월 예능 작가 186명 대상으로 한 조사를 봐도, 36.8%(68명)가 계약서 없이 일하고 있다고 답했다.


정수연(가명·이하 정)="저도 한 유튜브 방송사에서 일할 때 3개월 초단기 계약서를 썼어요. '여기 사람 안 자른다' 말만 믿고 계약했는데, 3개월 지난 후 갱신을 안 하더라고요. 갱신 얘기를 꺼내도, 돌아오는 반응은 '쓰시려면 쓰시고요. 행정팀에 말해드려요?' 이런 식이니 눈치를 볼 수밖에요."

임금 떼여 고용청 가도 "도와줄 수 없다"

방송작가들은 일을 했어도 돈을 못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올림픽 등 각종 세계대회나 재난상황 발생, 이유를 알 수 없는 방송국 사정으로 편성이 바뀌는 경우 이미 방송은 제작했어도 '송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고료가 지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방송작가유니온 유튜브에서 방송작가들이 가면을 쓴 채 결방료 미지급 문제를 토로하고 있는 모습. 방송작가유니온 유튜브 캡처


방송작가는 박봉으로도 악명 높다. 주급이 '연차 곱하기 10만 원'으로 동결된 지 오래다.
방송작가유니온과 일하는시민연구소의 2023년 온라인 설문 결과, 평균 임금 월 269만 원이었다.
예능, 드라마, 시사교양, 보도 등 업계별 편차는 있어도, 노동시간을 따져보면 상당수 작가가 최저임금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김="최근 7년 차 후배를 만났는데, '얼마 받니' 물었더니 주급 70만 원이래요. 저도 7년 차였을 때 주급 70만 원 받았거든요. 그 당시 최저시급이 4,000원이에요. 근데 올해 1만 원이잖아요.
최저임금 2.5배 오르는 동안, 작가료는 제자리
인 거죠. 너무 놀랐어요, 저도."

15년 차라고 주 150만 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주급 100만 원 정도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탓이다. 평소처럼 몸을 갈아넣어 방송을 준비해도, 갑작스러운 일로 대신 특보를 편성하면 '방송이 나가지 않았다'며 돈을 못 받기도 한다.
방송 비정규직 단체 '엔딩크레딧'과 직장갑질119의 지난해 조사 결과 결방 시 임금을 아예 못 받은 경우가 4명 중 1명, '일부'만 받은 경우가 절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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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보도전문채널 A사는
작가들
월급일도 들쭉날쭉해, 카드값이며 월세며 언제 낼 수 있을지 몰라 전전긍긍
하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정="A사는 돈을 언제 줄지를 몰라요. 보통 직장인이면 25일, 26일 월급날이 정해져 있잖아요. 근데 거기는 그냥 결재 라인에 있는 담당자랑 PD 마음대로인 거예요. 담당자가 휴가 가면 월급을 못 받는 거죠. 생활을 어떻게든 해야 하니 '월급날을 지정해달라'고 항의한 작가도 있었는데,
경영 담당자가 PD를 불러서 '프리랜서 작가가 직접 경영팀에 메일 못 보내게 하라'
고 했다더라고요."

김="어떨 때는 주급이 3주치가 들어올 때도 있고, 2주치가 들어올 때도 있고 일관성이 없대요. 3주째 임금 안 들어와도 작가만 애가 타는 거죠. 월급날 지정하는 게 시스템적으로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작가는 힘들어도 정규직은 아무 불편 없으니 불합리한 관행이 유지되는 거겠죠."

지난해 임금체불액은 사상 처음 2조 원을 넘긴 2조448억 원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실제 '떼인 임금'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는 관할 고용노동청에 임금체불 신고조차 어렵기에, 당국에 포착되지 못하는 '숨은 체불액'도 상당할 것이다. 2021년 9월 6일 양대노총·참여연대 등 단체들이 임금체불 근절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 박봉조차 제대로 챙겨 받지 못하는 '임금체불'도 적지 않게 발생한다. 고용노동청을 찾아가도 소용이 없다. 형식상 근로자가 아니니 들여다볼 것도 없다는 식이다.

박="20대 후반 때 세 달 동안 외주 프로덕션에서 쪽잠 자가며 급하게 방송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급여 절반을 떼였어요.
내용증명도 보내고, 고용노동청에 진정도 넣고 다 했는데 '너는 근로자가 아니라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죠.
회사 법인까지 없어지니 더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때는 서브 작가라 돈도 진짜 쪼끔 받을 때였는데, 정말 못 해먹겠다 싶어서 그때 잠깐 작가를 관뒀죠."

김="방송국 본사는 그래도 임금 떼일 걱정은 없지만, 외주 프로덕션에서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기획 단계에서 작가들이 돈을 조금만 받거나 아예 안 받고 3~4개월 일할 때도 있어요. 본사에서 일감을 따내기 전까지는 무일푼으로 일하는 거예요. 방송이 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엎어지면 아예 못 받는 경우도 있고요."

방송작가 주 평균 근로시간은 53.8시간

게티이미지뱅크


프리랜서 계약의 문제는 '쉬운 해고'가 가능한 점도 있지만, 사회보험이나 기본적인 연차·병가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김="제가 프리랜서 시절일 때는 아프거나, 가족이 아파서 급히 병간호를 해야 할 때도 일을 빠질 수가 없었어요. 단순히 돈 못 받는 문제(유급휴가 없음)가 아니라, 급한 일이 생겨도 생방송에서는 "너 정도 일할 수 있는 대타(대체인력) 구해와"라는 식이에요. 어떤 작가는 가족상을 당했을 때도 대타를 구해놓고 갔다고 하더라고요. 인력이 충분하지 않으니 대타가 없으면 남은 사람들만 피해 보는 구조인데, 그 책임을 작가 개인에게 지우는 거죠."

김 작가는 2000년대 초부터 줄곧 프리랜서로만 일하다가, 2021년 고용부 감독 결과 근로자성이 인정돼 복직투쟁을 통해 이듬해 무기계약직(방송지원직)으로 재고용된 경우다. 처우는 MBC 내 다른 정규직과 비교하면 여전히 차별적인 측면이 있지만, 작가 생애 처음 연차나 병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박="출근하려면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야 하는 아침 방송을 한 적이 있어요.
근데 어느날 위 경련 때문에 새벽에 깨서 응급실에 갔어요. 담당 PD가 전화로 '링거 맞고 오실 거죠?'라고 묻는데 소름 돋더라고요.
배가 아파서 정말 미칠 것만 같은데, '맞고 바로 갈게요'라고 했죠. 너무 눈물 났죠. 그 와중에 방송 앵커는 '몸 괜찮냐' 말 한마디 안 하고요. 그날 내가 쓰다가 죽더라도 여기서 죽어야 되는구나, 그 생각을 했어요."

과로도 일상이다. 그날의 방송은 끝났어도, 곧바로 다음 방송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 탓이다. 일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한빛센터 조사에 따르면, 예능 작가들은 일평균 9.4시간을 일하고 평균 주당 노동시간은 53.8시간으로 나타났다.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2019년 실태조사에서도 주 40시간 이상 일한다는 경우가 전체 63%였다.


박="아침에 방송사에 출근해, 오후 3시쯤 생방송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은 딱 한 번 가요. 점심 먹을 시간은 없고요. 방송 마친 뒤에는 다시 다음 날 준비하고, 퇴근한 후에도 집에서 계속 아이템 때문에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죠."

※30일 공개되는
<하편> "내가 작가 하나 못 잘라?" 본부장 호통에 '일 잘하는 나'는 바로 잘렸다"
기사로 이어집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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