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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내린 ‘찔끔비’가 결국 구원의 ‘단비’
살신성인 진화·소방대원들, 주민·자원봉사들 ‘영웅’
사상 최대·최악 산불로 기록…숱한 과제 남겨
정부 역할은 어디에, 지자체 ‘각자도생’식 대응
지난 23일 경북 의성군 안평면에서 산불이 확산되고 있다. 문재원 기자


필요한 건 딱 1~2㎜의 ‘단비’였다.

지난 21일 경북 의성에서 발생해 동북권을 집어삼킬듯이 번지던 산불이 일주일만에 진화됐다. 산림청은 28일 오후 5시 “경북 산불이 모두 진화됐다”고 선언했다.

전날 오후 늦게 들어 내린 ‘찔끔 비’가 결국 단비가 됐다. 지난밤 65%대에 머물던 진화율은 기상여건이 개선되면서 오전부터 급진전됐다.

통상 산불 진화에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5~20㎜ 정도의 비가 내려야 하는 것으로 본다. 산림청도 전날 찔끔 내린 비에 “큰 도움은 못될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진화 현장 관계자들도 잠깐 내리다 그친 비에 하늘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쏟았다.

하지만 이날 새벽을 지나며 상황은 반전됐다. 기상청 집계를 보면 27일부터 이날 오후까지 의성에 1.5㎜, 안동 0.2㎜, 영덕 2.0㎜, 청송 1.6㎜ 의 비가 각각 내렸다. 적은 양이라 “분무기 수준”이라고 했던 이 비는 산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던 ‘연무’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군 CH-47 헬기가 경북 의성군 화재지역에 물을 뿌리고 있다. 공군 제공


연무 때문에 발목이 잡혀있던 진화헬기들이 아침 일찍부터 전면 투입됐다. 전날 한창 연무가 심할 때는 실제 가동되는 진화헬기가 30%를 밑돌았다. 임상섭 산림청장은 산불 발생 이후 처음으로 “오늘 진화하기 좋은 날씨”라며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이때부터 진화율은 크게 오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며칠 내 불던 강풍도 잦아들었다. 이날 의성 지역에는 초속 4m의 바람이 불었다. 산불이 급확산되던 시기에는 초속 25m의 ‘태풍급’ 바람이 불었다. 적은 비에도 주변 습도가 올라 산불 확산이 억제됐다.

임 청장은 “주불이 진화될 정도로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면서도 “이날은 기상 여건이 좋았다. 진화 헬기가 처음으로 원활하게 투입될 수 있었고, 불똥이 다른 지역으로 날아가 확산하는 속도도 현저히 줄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며칠간 총력전을 펼쳤음에도 진화율이 50~60%에 머물렀던 점을 감안하면 ‘1㎜ 단비’가 가져온 결과는 기적에 가깝다.

날씨가 ‘주연’이었다면 ‘조연’은 산불 진화에 헌신을 다한 산림청·지자체 소속 진화대원들과 소방청 소속 소방관들이었다. 하루 1시간도 제대로 못자는 강행군을 펼치면서도 끝까지 최전선에서 진화에 나섰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피난도 마다하고 남은 각 지역 주민들, 갈퀴와 물펌프를 지고 산에 오른 지자체 공무원들, 전국 각지에서 달려와준 자원봉사자와 시민들 모두 산불 진화의 조력자들이었다.

26일 오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산불 현장에서 진화대원들이 진화작업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산청군 제공


경북 지역을 할퀸 이번 산불은 1주일 간 총 4만5157ha(산불영향권역 추정치)를 태우고 사그라졌다. 서울 전체 면적의 절반을 훌쩍 넘는 사상 최대 규모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전 최대 규모였던 2000년 동해안산불의 피해면적(약 2만3000ha)의 갑절에 달한다. 경북 지역 사망자만 24명, 산청 산불 사망자(4명)까지 더하면 역대 최악의 인명피해를 냈다. 산불로 대피한 경북 지역 주민 수만 3만3000명에 달하고, 주택 수백 채가 전소되는 등 수많은 이재민과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산불 진화는 끝났지만 산불이 이렇게까지 확산된 원인과 배경, 문제점 등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많은 소방전문가들은 산불 초기 대처 및 진화에 실패한 점을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을 초기 사나흘간 제압하지 못하면서 결국 안동, 청송, 영양, 영덕에 이르기까지 경북을 동쪽으로 횡단해 급속히 산불이 번졌다. 일각에서는 대응 초기 산림당국과 소방당국간 원활한 협조가 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의성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이 닷새째 이어지고 있는 26일 안동시 임동면 야산에서 산불이 강풍을 타고 번지고 있다. 안동 | 성동훈 기자


부족한 산불진화 인프라 문제도 되돌아봐야 한다. 산림청이 보유한 산불진화 헬기는 모두 50대다. 이 중 담수량 8000ℓ의 대형헬기인 S64는 7대에 불과하다. 이어 담수량 3000ℓ의 KA-32(카모프) 29대, 2000ℓ의 KUH-1(수리온) 3대 등이다. 나머지 11대는 담수량 600~800ℓ의 소형이다.

주력 기종인 KA-32 헬기 중 8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부품을 교체하지 못해 지난해 상반기부터 운용이 중단됐다. 가뜩이나 헬기 수도 부족한 상황에서 전국 동시다발적인 산불이 일자 현장에 투입가능한 헬기 수가 분산됐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산불 확산을 막지 못했다.

경북도의 산림면적은 134만ha로 강원도(137만ha)와 비슷하면서도 ‘비상소화장치’는 경북도가 강원도의 25% 수준에도 못미치는 등 전반적으로 산불 진화 인프라가 부실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자체 산불 발생 시 투입되는 ‘예방진화대원’의 경우 이번 산불을 통해 고령화 문제와 부실한 운용 실태가 드러났다. 실제 산청에서는 진화대원 3명이 불길에 고립돼 숨지는 등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 우리 산림의 주요 수종이 산불에 취약한 침엽수라는 지적도 고민해봐야 한다.

의성 산불이 경북 북부로 확산 중이던 지난 26일 경북 영덕군 영덕울진축산농협이 전소돼 있다. 한수빈 기자


정부와 지자체의 산불 위기관리·대응 시스템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경북 산불 사망자의 대부분이 60~80대 노인층으로 재난에 취약한 계층이다. 정부 지자체는 재난문자를 통해 실시간 산불 확산을 전파하고 대피를 안내했지만, 알아서 대피하라는 식의 문자 메시지로는 인명을 구할 수 없음이 확인됐다. 사망자 태반이 집이나 피난길에 산불을 만나 소사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정부차원의 대응이 적절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정부는 산불발생 초기 국가재난사태, 특별재난지역 등을 잇달아 선포하고도 산불 확산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오도창 영향군수가 이날 정부와 경북도를 향해 “사흘간 헬기 지원을 못받았다. 영양이 불타고 있다. 도와달라”고 공개 호소한 것은 정부 컨트롤타워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중대본은 각 지역 산불 진화율이나 피해현황 등 기초적인 통계조차 제대로 집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해지역 주민들에 대한 지자체 차원의 현금 지원 등 구체적인 지원책도 산불 발생 1주일 가량이 되어서야 나왔다.

결국 산불이 돌이킬 수 없게 커진 뒤인 지난 27일에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피해 현장에 상주하며 대응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지자체들은 ‘각자도생’식으로 확산과 대피를 안내했고, 구호소나 대피소의 여건이나 환경도 제각각 달리 운영되는 등 위기관리에 한계를 드러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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