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까지 나고 자란 마을 위해 헌신
"어둠 속 꺼지지 않는 등불 같던 부부" 추모
"어둠 속 꺼지지 않는 등불 같던 부부" 추모
26일 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삼의리 이장의 집이 불이 켜진 채 비어있다. 이장 부부는 전날 의성에서 번진 산불로 목숨을 잃었다. 영양=이유진 기자
'괴물 산불'의 화마가 휩쓸고 간 경북 영양군에서는 6명의 사망자가 나왔는데 이중엔 석보면 삼의리 이장 권모(60)씨 부부와 권씨의 처남댁도 포함돼 있다. 이들 3명은 돌풍을 타고 번지는 산불에도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대피소로 향하지 않고 마을 방향으로 차를 몰다가 변을 당했다.
26일 밤 한국일보가 찾은
권씨의 집은 주민들이 모두 피해 깜깜한 마을 속 홀로 환히 불빛이 켜져 있었다.
부부가 집을 나서며 집의 등을 끄지 않고 뛰쳐나간 듯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을 본
권씨의 이웃과 친구들은 "이장 부부는 저 등불 같은 사람들이었다
"고 애석해 했다. 삼의리 주민 이경세(81)씨는 "또래들은 죄다 도시로 빠져 나가는데 '내는 여기가 좋심더'하며 끝까지 고향마을 지킨 기특한 사람"이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권씨의 '이장 선배'이기도 한 이씨는 "(권씨가) 이장을 두 번이나 했는데 한결같이 동네 사람 일이라고 하면 발 벗고 나서서 다들 많이 아꼈다"며 "이제 행복하게 나이 들 일만 남았는데 어쩌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함께 세상을 떠난 아내 우모(59)씨와도 각별히 지냈다는 이웃 김모(70)씨 역시 "내외가 참 착했다"며 "
불 못 피한 마을사람 있을까, 걔들이 책임감 때문에 그러다가 당한 기라
"라고 눈물을 훔쳤다.경북 영양군 석보면 심의리 이장 가족 3명이 탑승했던 차량이 26일 산불에 불탄 채 영양군 삼의계곡 부근에서 발견됐다. 영양=연합뉴스
영양군 등에 따르면 25일 오후 6시쯤부터 산불이 빠르게 번지며 석보면 일대의 전기와 통신이 끊겼다. 삼의리 이장 권씨는 이로부터 약 30분 전 주민들 개인 휴대폰에 안내용 음성 메시지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곤 인근 마을에 사는 처남댁을 구조해 차에 태운 뒤 삼의리로 향했다고 한다. 대피소로 지정된 석보초등학교와 반대 방향이었다. 통신이 끊겨 고립돼 있을지 모르는 주민들을 구하려고 돌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권씨 부부와 연을 맺은 지 10년이 넘었다는 최지수(62)씨는 이들을
귀촌한 이방인에게도 따뜻했던 친구이자 항상 희생하던 사람들
로 기억했다. 부부는 매년 겨울이면 끼니를 거르는 어르신들을 챙긴다고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꽁꽁 언 밭을 대신 갈고 비닐까지 깔아주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마을 통신이 끊기기 1시간 전 마지막 통화에서도 권씨는 "밭일 도와주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처음엔 (권씨가) 일이 몰려 사흘 뒤에나 시간 된다더니 '약초는 사오고 바로 심어야 돼'라고, 자기 할 일 제껴 놓고 돕겠다고…"
권씨의 죽음에 온 마을이 비통에 잠겼다. 그러나 충분히 애도할 시간도 없이 삼의리 주민들은 짐을 싸야 했다. 26일 밤 석보면 인근에 다시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불도 못 끄고 갔네…"
짐을 챙기던 이웃 김씨는 깜깜한 창밖, 유일하게 밝게 빛나는 권씨의 빈 집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