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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대통령실이 삭감된 연구·개발 예산을 다시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초과학 분야의 지원 대상이 크게 줄어 연구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지난해 삭감됐던 연구·개발(R&D) 예산이 올해 복원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파탄 나다시피 한 연구 생태계는 여전히 고사 상태에 빠져 있다. 주변을 둘러보거나 교수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아무런 연구비를 받지 못한 연구자가 많다. 좋은 논문·특허를 갖고 학생들을 산업계에 배출한 교수도 예외가 아니다. 2년간 연구비를 못 받으면 학생들을 내보내고 연구를 멈출 수밖에 없다. 연구의 맥이 끊기며 세계 무대에서 도태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원 대상 기초연구 3분의 1 줄여 필자는 결코 R&D 예산을 더 늘려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기초과학이 R&D 예산의 6%를 차지하는데, 이 비중을 올려 달라는 얘기도 아니다. 예산을 몰아주기식으로 불균형하게 배분하지 말고,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하는 방식으로 집행해 달라는 것이다. 기초연구비는 규모에 따라 신진, 기본, 중견 연구가 있다. 신진부터 시작하여 기본을 받고, 중견으로 성장하는 생태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기본 연구 지원을 아예 없애 버렸다. 대신 개별 연구비 규모를 늘렸다. 2년 전과 비교해 신진은 1억원에서 2억5000만원으로 대폭 상향됐다. 중견 중 가장 일반적인 ‘유형1’은 1억5000만원에서 2억5000만원으로 올랐다. 많이 받으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배분으로 인해 연구 생태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선택과 집중 전략, 과제 너무 줄여
중간 기초연구 '연구비 0원' 많아
총액 유지하되 지원 대상 늘려야
동일한 총액에서 개별 연구비 규모를 키우면 개수가 줄어든다. 전체 개수를 세어 보면 약 3000개에서 2000개로 줄었다. 즉 예전 같으면 성실히 과제를 받아서 수행했을 연구자 세 명 중 한 명의 연구비가 0원으로 삭감됐다. 이렇게 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학생을 받을 수도 없고 연구의 맥도 끊긴다. 세계 무대에서 칼을 갈아 싸우는 전투 센스도 무뎌지게 된다. 자동으로 도태되는 것이다.

어차피 잘하는 소수한테 몰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개수가 뒷받침돼야 한다. 이번 중견 유형1 선정이 910개였는데, 연구재단에 등록된 세부 분야의 개수는 1000개가 넘는다. 즉 특정한 분야는 아예 1팀도 선정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각 분야의 월드클래스 연구자 중 단 1명만 받거나 아예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청운의 꿈을 갖고 임용된, 가장 창의성과 열정이 높은 주니어 교수들이 큰 문제다. 가장 잘하는 시니어 1명만 받는 구조에서는 중간급 연구자나 교수가 연구비를 하나도 받지 못한다. 이들이 강제로 연구를 쉬게 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해다.

기초과학은 어차피 당장 돈이 안 되니 별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기초과학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은 사실 산업계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응용과학이 대다수다. 전기·기계·컴퓨터·인공지능·우주항공·화학·에너지·원자핵 등이 모두 기초과학에 속해 있다. 이런 영역에서 연구하며 실력을 쌓은 석·박사 인재들이 산업계로 배출된다. 기초과학보다는 ‘기반과학’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기초과학과 최첨단 산업기술은 칼로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필자는 컴퓨터학을 전공하고 의대 교수로 임용돼 의학과 공학을 융합한 유전체 연구를 하고 있다. 필자의 제자인 A군은 전기공학부 학생이었는데 인턴으로 의대 연구실에 와서 좋은 기초과학 논문을 작성했다. 유전체 분석에 대한 수학적 모델링 연구였다. 이 논문 실적을 바탕으로 A군은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의료 인공지능(AI)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들어 해외 유력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다. 딥시크와 같은 단독 AI를 파운데이션 모델이라고 한다. AI 기술이 중요한 이때, 나라에 꼭 필요한 인재로 성장한 것이다. 이렇게 기초과학에서 훈련된 인재들이 첨단산업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는 얘기다.

만일 연구비 삭감이라는 상황이 6년 전의 내게 발생했다면, 필자는 아마도 연구비를 못 땄을 것이다. 그러면 A군이 필자의 연구실에 지원했을 때 인건비를 줄 수 없어 거절했을 것이다. A군은 아마 연구에서 멀어졌거나, 어쩌면 좋은 기업에 취직했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스타 과학자로 성장하고 있는 지금의 A군이 아예 학계에 없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기초과학, 산업 밀접한 응용과학 다수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지금 연구비가 없어 고통받는 연구자들이 많다. 이러한 연구실에서 충실히 키워 냈을 10년 뒤 미래의 스타 과학자들이 한국의 미래에서 사라지고 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래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기초과학은 나무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많은 실력 있는 연구자들이 다양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미래에 결실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복원된 R&D 예산의 6%인 기초과학 예산을 더 많이 늘려 달라는 요청이 아니다. R&D 예산에 대한 정부의 ‘선택과 집중’ 기조를 일방적으로 폄훼하는 것도 아니다. 기초과학은 기초과학만의 특성이 있다. 똑같은 예산을 집행해도 생태계를 복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기본연구를 다시 살리고 개별 연구비 규모를 줄여서 과제의 개수를 많이 늘려야 한다. 연구의 명맥이 끊기게 된 연구실이 너무 많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금방이지만 복원은 훨씬 오래 걸린다.

한범 서울대 의대 의과학과 교수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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