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신성장 전략 특별기획 : 전력기기·전선]
HD현대일렉트릭 앨라배마 공장. 사진=HD현대일렉트릭
전력기기 분야도 조선, 방산에 이어 관세 무풍지대로 주목받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한국산 초고압변압기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할 예정인 가운데 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은 선제적인 투자로 미국 현지 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며 AI 데이터센터 증가와 노후 전력시설 교체 수요가 도래하며 전력기기 업체들은 전력기기 슈퍼사이클에 올라탔다. 데이터센터 랙당 요구하는 전력 밀도가 일반 데이터센터는 10~14킬로와트(kW)지만 AI 데이터센터는 20~40kW를 요구한다. 시장조사업체 마켓닷US에 따르면 글로벌 변압기 시장 규모는 지난해 720억 달러(약 105조원)에서 2033년 1230억 달러(약 180조원)까지 커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석유 및 천연가스 시추를 전면 확대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미국의 에너지 패권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미국 내 AI 인프라 건설에 5000억 달러(약 718조원)를 투자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발표한 것도 한국 전력기기 업체들에 호재다.
오픈AI가 2022년 말 챗GPT를 내놓으면서 생성형 AI 시대를 연 이후 다양한 분야 기업들이 AI를 제품과 서비스에 앞다퉈 도입하려고 하면서 AI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모회사인 메타플랫폼스는 루이지애나, 와이오밍 또는 텍사스주에 2000억 달러 규모의 데이터센터 건설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전력기기 빅3 영업이익. 그래픽=송영 기자
슈퍼사이클 왔다…美 전력 수요 급증에 생산캐파 확장
일론 머스크의 xAI는 멤피스에 있는 AI 데이터센터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최근 9만3000㎡ 규모의 대지를 추가 매입했다. 데이터센터 개발에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25 회계연도에 약 800억 달러(약 114조원)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했고 아마존은 데이터센터 확장에 올해 1000억달러 이상의 자본 지출을 계획하고 있다.
미국 국립 재생에너지연구소(NREL)는 2050년까지 변압기 공급이 2021년 수준 대비 160~260% 증가해야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 조사에 따르면 대형 변압기의 70%가량이 설치 수명 25년을 초과해 교체 시기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의 ‘미국 전력망 산업 동향 및 우리 기업 진출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내 송전선의 70%가 25년 이상, 대형 변압기는 평균 40년 이상 지났다.
보고서는 “미국에서는 최근 ‘전기 먹는 하마’라고도 불리는 AI 데이터센터의 증가와 산업 전기화로 전력 소비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인프라가 노후화된 데다가 동부·서부·텍사스 권역으로 단절된 전력망 특성상 전력 공급이 효율적이지 못해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민관 모두 인프라 개선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거대한 시장이 열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에서 송·배전망 등 전력 인프라의 노후화가 심각해 향후 대규모 투자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돼 한국 전력기기 업체들에 큰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효성중공업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공장. 사진=효성중공업
미국 초고압변압기 시장점유율 1위인 HD현대일렉트릭은 2024년 연간 매출 3조3233억원, 영업이익 6690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대비 22.92%, 영업이익은 112.22% 증가했다.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이다. 특히 북미 시장의 견조한 수요에 힘입어 전력기기 매출이 전년 대비 50.6% 증가하며 성장세를 견인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이미 5년치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앞으로 수요 증가에 대비해 내년까지 4000억원을 투자해 미국 앨라배마와 울산 변압기 공장 생산량을 30%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두 공장의 증설이 완료되면 총 3000억원의 매출 증대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
초고압변압기는 대당 60억~130억원에 이르는 고가인 만큼 투자 효과가 본격화되는 2028년부터는 최대 연간 3000억원의 매출 증대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HD현대일렉트릭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는 값싼 에너지의 대량 생산과 수출을 통해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고 하며 이를 위해 발전설비 및 송전망 확충이 필수적”이라며 “HD현대일렉트릭은 시장의 수요를 면밀하게 분석해 국내 및 미국 현지 생산 역량을 기반으로 시장의 수혜를 극대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효성중공업은 5년 전 인수한 미국 멤피스 변압기 공장이 트럼프 2.0 시대에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효성중공업은 이 공장을 2020년 일본 미쓰비시로부터 4650만 달러(약 500억원)에 인수했다. 미국의 전력 인프라 노후화로 교체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보고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지난해 6월 1000억원을 투자해 창원과 멤피스 공장의 생산능력을 기존 대비 2배가량 높이기로 했다. 효성중공업은 관세정책과 미국 시장 수주 대응력을 확대하기 위해 멤피스 공장에 대한 추가 투자도 검토하고 있다.
효성중공업은 지난해 매출 4조8950억원, 영업이익 3625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각각 13.8%, 40.6% 증가한 것으로 역대 최대 실적이다. 효성그룹 전체 매출의 26.8%를 차지했다. 효성중공업이 캐시카우로 부상하며 그룹 내 위상도 달라졌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 올해 정기주주총회를 통해 효성중공업 사내이사로 합류하며 멤피스 공장 증설 등 대규모 투자를 직접 지휘한다. 조 회장이 효성중공업 이사회에 등기된 건 2018년 출범 이후 처음이다.
효성중공업 관계자는 “가장 난도가 높은 765kV 변압기를 미국 공장에서 생산하는 회사는 효성중공업이 유일하다”며 “멤피스 공장을 중심으로 AI 확산에 따라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 내 전력 수요에 대응하고 현지 생산기지로서 경쟁력을 더욱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LS일렉트릭. 사진=로이터·연합뉴스
K전선도 이상무…LS·대한전선, 관세 폭격에도 호황 이어간다
최근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대형 전력 인프라, 배전반(전력 배분 장치) 등 전력 시스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LS일렉트릭의 사업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최근 북미 빅테크 회사를 상대로 1600억원 규모의 전력 솔루션 공급 계약을 따냈다. 앞서 LS일렉트릭은 지난해 같은 프로젝트에서 약 900억원의 수주 물량을 확보한 바 있다. 2023년부터 오는 2028년까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의 연평균 증가율은 11%로 추정되며 AI 데이터센터까지 합치면 연평균 증가율은 26∼36%로 관측된다. 부산 초고압변압기 생산능력(캐파) 확대를 위해 총 1008억원을 투자했으며 이를 통해 2027년부터 초고압변압기 캐파가 총 7000억원 규모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LS일렉트릭은 10여 년 전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미국 배전시장 진출에 필수인 UL 인증을 확보해 글로벌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2022년 미국 전력 배전반 생산업체인 MCM엔지니어링Ⅱ를 인수하며 현지 생산을 시작했다. 반도체·배터리 업체들이 북미 진출을 가속하며 배전 인프라 수요가 급증하자 이 같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내 생산능력 확대에 집중해왔다. LS일렉트릭은 선제적인 대응으로 삼성전자 테일러 공장을 비롯해 현대차, LG에너지솔루션, SK온의 현지 생산 거점에 배전 시스템을 공급하며 수혜를 봤다. 2023년 텍사스 배스트럽 부지를 인수해 현지 생산거점을 구축 중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운영하는 AI 개발사 xAI 데이터센터에도 전력기기를 납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력기기는 AI 데이터센터 투자비의 8% 수준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은 트럼프 2기의 관세 부과 방침과 관련 “트럼프 행정부 이전부터 MCM과 배스트럽 공장을 인수했기 때문에 관세와 상관은 없다”며 “관세가 생기면 기본적으로 계약서를 맺을 때 반반씩 하는 것으로 하려고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이 최근 중국산 케이블에 총 45%의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산 소재를 활용한 우회 수출 규제도 강화하고 있어 한국 전선업체들의 반사이익도 기대된다. 미국, 유럽연합(EU), 대만 등 전 세계적으로 자국 산업 보호와 국가안보를 이유로 중국 부품사의 해상풍력발전 입찰을 제한하고 시장에서 퇴출하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모든 수입품에 10~20% 보편관세를 예고한 것도 현지 생산시설을 구축 중인 한국 전선업체들에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LS전선은 약 1조원을 투자한 미국 버지니아주 해저케이블 공장이 올해 4월 착공할 예정이다. 버지니아 주정부와 에너지부로부터 총 1억4700만 달러 지원금도 받았다. 대한전선도 관세 부담을 덜고 미국 현지 생산을 확대하기 위한 시설 투자, 업체 인수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