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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과 경의·중앙선, 경춘선, 수인분당선까지 지나가 유동 인구가 항상 많은 서울 동대문구의 청량리역.

시끌시끌한 역전에서 10분가량 걸으면 주거 지역인 용두동이 나옵니다.

오래된 빌라와 신축 오피스텔이 섞인 비교적 한가로운 동네의 가운데, 2년 넘게 방치된 공사장이 있습니다.

인근 주민들은 "원래 있던 교회를 허물고서는 공사를 시작도 안 해 벌레만 꼬인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교통 좋고 살기 좋은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버려진 공사장, 그 배경엔 '빌라왕'이 있습니다.

■ '내 집 마련' 꿈 안고 빌라 분양 계약...알고보니 바지사장


이 자리엔 원래 6층짜리 번듯한 신축 빌라가 들어왔어야 합니다.

이 신축 예정 빌라를 분양받기로 하고 계약금과 중도금을 낸 수분양자는 13명.

이들은 지난 2022년 6월, 적게는 9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6천만 원을 내고 분양 계약서를 썼습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노후 자금까지 털어 넣은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연말에 준공될 것이라던 말과 달리 공사는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난데없이 '유치권 행사'를 운운하는 현수막이 붙었습니다.

그제야 확인해 보니 땅을 담보로 20억 원이 넘는 대출이 잡혀있었습니다.

성공적으로 빌라 분양을 마쳐도 갚을 수 없는 규모의 대출.

시행사가 부도를 내며 땅이 경매에 넘어갔는데, 분양 계약서에 '매도인'으로 적혀있던 토지주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토지주의 정체는 명의만 빌려준, '바지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를 쓸 당시 부동산 공인중개사가 위임장을 보여주며 '대리인으로 계약을 진행한다'고 해 믿은 게 발등을 찍었습니다.

바지사장을 앞세워 계약금과 중도금을 챙기고, 토지 담보 대출을 최대한 끌어모은 뒤 부도를 낸 '분양사기' 정황이 드러난 겁니다.

■ 시행사 대표가 명의 사들여 계약 관리...피해 규모 약 50억 원


바지 사장들의 계약과 통장을 관리하던 이는 시행사 대표 홍 모 씨.

홍 씨는 바지 사장들에게 2천500만 원씩 주고 명의를 사들여, 분양 계약을 맺거나 담보 대출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이행 각서'까지 썼는데, 사업자 등록증과 통장을 홍 씨에 넘긴 후 수익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홍 씨에게 명의를 빌려준 사람들은 확인된 사례만 10명이 넘습니다.

바지 사장들은 부도 이후 토지 담보 대출과 이자를 고스란히 떠안게 됐는데, 한 달에 독촉장만 10장 넘게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A 씨/토지 명의대여자(바지사장) "부동산 가서 계약서를 자기들끼리 썼다더라고...내 이름으로 대출 신청까지 해놔서 빚이 8억이에요"

홍 씨는 이런 방식으로 서울 성북구와 동대문구, 경기도 구리시 등 모두 5곳에서 분양 사기를 벌인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40여 명, 피해 금액은 50억 원에 달합니다.

[단독] 가짜 토지주 앞세워 분양사기?…50억 챙긴 시행사 대표

■ "사기 의도 없었다" 해명과 달리 조직적으로 움직여...사기 혐의로 송치

취재진을 만난 홍 씨는 '사기 의도가 전혀 없었다'며, '사업이 어려워져 부도가 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홍 모 씨/시행사 대표 "전세사기가 딱 터지면서 PF 대출이 막혔어요. 최악의 상태까지는 생각해야 했는데 사업을 욕심내서 무리하게 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해명과 달리, 홍 씨의 분양 사업은 바지 사장 모집부터 수분양자 모집까지 조직적으로 역할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바지 사장 모집은 시행사 현장소장이 맡았는데, 자신의 지인까지 동원해 바지 사장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건당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의 수수료를 받기로 하고 수분양자를 모은 뒤, 바지 사장의 위임장을 받아 계약을 대리로 체결한 공인중개사들도 있었습니다.

부동산 매매 계약금과 분양 대금이 오갈 계좌를 홍 씨 시행사에 건네고, 건축주로 이름을 올린 공범도 두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황인 법무법인테헤란 파트너 변호사는 "분양사기는 조직적이지 않고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범죄"라며 "시행사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수분양자가 형식을 확인하기 어렵고 정보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이런 조직적 구조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수분양자들은 홍 씨와 바지 사장을 여러 차례 경찰에 고발했는데, 홍 씨가 사기 혐의로 두 번이나 송치될 동안 현장소장과 공인중개사 등은 수사 대상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의 고발장을 병합해 수사를 이어온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지난해 12월, 홍 씨를 비롯해 바지 사장 모집책과 공인중개사 등 모두 10명을 사기 등 혐의로 불구속 송치했습니다.

그런데 홍 씨의 범행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수상한 서류 더미에서 발견된 홍 씨의 추가 범행과 피해 구제의 어려움을 살펴봅니다.

[단독] 빌라왕의 조력자들?…“역할별로 조직적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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