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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현장 가보니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의 김재인씨가 불에 타버린 자신의 창고를 허탈하게 바라보고 있다. 주성미 기자

“50여년 내내 모은 게 다 이래 돼뿟네. 평생을 빚내서 갚고, 또 갚으면서 모아온 건데…. 다 타뻐려가(타버려서) 남은 것도 없고, 이걸 다 어째.”

23일 오후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들머리에서 만난 김재인(75)씨가 새카맣게 타버린 자신의 ‘전 재산’을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김씨 부부는 50여년 전부터 이 마을에서 사과농사를 지으며 산다고 했다. 마을 들머리에는 김씨 부부가 사는 단층짜리 집과 그들의 일터인 사과밭, 저온창고와 농기계 창고가 한데 모여있다.

불에 타버린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김재인씨의 창고. 주성미 기자

김씨 부부는 전날 오후 집 앞 야산에 뿌연 연기가 올라오는 걸 보면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안평초등학교 체육관으로 대피했다. 잠도 오지 않는 간밤에 몇번이나 마을 앞을 오갔다. ‘불이 좀 꺼졌나’, ‘집은 괜찮은가’ 불안한 마음을 겨우 붙잡았단다. 불길이 잡혔다는 소식에 김씨 부부는 이날 오전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외벽엔 새카만 그을음이 생겼고, 불길을 견디지 못한 유리창이 깨져버렸지만, 집 안을 채운 연기만 빼면 살림살이는 쓸 만하다고 했다. 문제는 흔적도 없이 녹은 듯 불에 탄 저온창고와 농기계 창고, 그 안에 가득한 농기계들이었다.

불에 타버린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김재인씨의 창고. 주성미 기자

김씨는 잡동사니를 보관하던 창고를 가리키며 “지금이 딱 올해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라 농약과 비료를 잔뜩 사서 창고에 쌓아뒀는데, 홀라당 다 타버렸다. 1년치 먹거리가 몽땅 날아가버렸다”고 했다. 부인 손귀옥(74)씨는 잿더미가 된 창고에서 뒤적거리며 쓸만한 것들을 찾아 마당에서 씻었다. 손씨는 “어째 남은 게 하나도 없다”며 유리병에 든 미지근한 음료수를 건넸다. 음료수병에서는 검은 재를 막 씻어낸 물이 뚝뚝 떨어졌다.

불에 타버린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김재인씨의 창고. 주성미 기자

김씨의 집 뒤뜰에 버섯을 키우려 세워둔 나무토막은 숯이 됐다. 농기계 창고의 제초기 아래쪽은 다 녹아 손잡이만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제초기가 있었던 것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김재인씨의 창고에 농기계가 새카맣게 타버렸다. 주성미 기자

창고 너머로 김씨가 키우는 사과나무들도 새카맣게 타버렸다. 어렵게 살아남은 사과나무들이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김씨는 “제때 약을 뿌리고 손을 봐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농자재와 농기계가 다 불에 타버렸으니 올 한해 농사는 다 날아갔다”며 “어디 올 한해 뿐이겠냐, 앞으로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어디 불이 났다고 하면 남의 일이라 생각했지. 내 일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하고 살았는데”라고 말하는 김씨는 “그래도 안 죽고 살았지 않느냐”고 위로하는 이웃 주민에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23일 오후 경북 의성군 안평면 천등산 자락의 운람사가 불에 탄 모습. 주성미 기자

23일 오후 경북 의성군 안평면 천등산 자락의 운람사가 불에 탄 모습. 주성미 기자

의성군 안평면 천등산 자락의 운람사의 일부 건물들은 불에 타 무너져내렸다. 건물 흔적은 바닥에 쓰러진 기왓장과 벽돌들만 남았다. 다행히 무너지지 않은 건물 군데군데 시커멓게 타버린 건 마찬가지였다. 소방관들은 불길이 더이상 번지지 않도록 건물 주변으로 물을 뿌리며 지켰지만, 산자락 곳곳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의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산 아래 신안리에서는 주인을 잃은 채 벌벌 떨고 있는 강아지가 발견됐다. 불을 끄던 산림당국 관계자들은 목줄을 차고 온몸을 떨고 있는 강아지 한마리를 구조해 마을 회관으로 옮겼다.

경북 의성군 산불 진화율은 23일 오후 1시 기준 51%를 기록한 뒤 별다른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산림당국은 오후 들어 강풍이 이어지며 불을 끄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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