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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실내체육관 대피한 어르신들
“옷은커녕 매일 먹는 약 한알도 없이 나와”
경남 산청군에서 발생한 산불 사흘째인 23일 단성면 일대에 산불이 마을 쪽으로 향하자 헬기가 물을 뿌리며 산불을 진압하고 있다. 연합뉴스

“불이 마캉(전부) 다 철길을 넘었는디, 다들 줄 잡고 물 뿌리고 한다잖예.” “우야꼬, 내참. 그래가꼬 되겠나.”

23일 정오께 경북 의성군 의성실내체육관 대피 텐트에 둘러앉은 업1리 어르신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날부터 타오른 산불이 마을 뒷산을 넘어 코앞까지 왔다는 소식에 정길자(75) 어르신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80여가구가 사는 마을에 수십년을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날 오전 어른거리는 불길을 피해 마을회관으로 몸을 피했을 때만 해도 주민들은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다. 옷가지는커녕 아침마다 챙겨먹는 약 한알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다. 길자 어르신은 “마을 사정을 살피러 다녀온 남편 덕분에 겨우 약을 챙겨먹었다”고 했다.

이주노동자 범나투가 산불로 간밤을 뜬눈으로 지샜다며 22일 밤 회사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주성미 기자

김금엽(79) 어르신은 “평생 살면서 그런 불은 처음 봤다. 집앞에 앉아 불을 보는데 넋이 나가는 것 같았다.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불길에 화끈거리던 얼굴이 아직도 벌건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뭐라도 챙겨야겠다 싶어서 금붙이는 가져나왔는데 비밀번호 적힌 통장을 빠뜨렸네”라며 연신 허리춤에 찬 가방을 쓸었다.

어르신들은 대구 등 다른 지역에 사는 자녀들이 집으로 모시겠다는 것을 한사코 뿌리쳤다고 한다. “여기 있으면 그래도 마을이 어찌 되는지 듣기라도 하지. 대구에 가봤자 마음만 불안하지.”

의성실내체육관에는 의성이(e)행복한요양원에 있던 어르신 60여명도 전날부터 몸을 피해 있다.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이들이지만,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탓에 텐트 없이 체육관 뒤쪽에 자리를 깔고 누워야 했다. 요양원에 모신 어머니를 보러 이른 새벽부터 충북 청주시에서 달려온 이성근(62)씨는 “의성에 산불이 났다는 소식에 불안했다. 통제된 고속도로가 풀리자마자 달려왔다”며 “어머니가 다친 곳 없이 무사하셔서 다행”이라고 했다.

이 요양원 입소자인 안계옥(79) 어르신은 “연기가 시커멓게 피어올랐는데 하늘이 뿌옇기에 처음에는 황사가 난 줄 알았다”며 “빨리 차를 타고 가야한대서 정신없이 왔다”고 했다.

산청, 의성, 울주, 김해 등 경상도 지역에 동시다발적인 산불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23일 오전 경북 의성군 의성읍 의성체육관으로 몸을 피한 이재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이주노동자들은 화마 근처에서 밤새 마음을 졸이다 23일 오후에서야 체육관에 왔다. 한국 거주 8년차인 네팔 출신 범나투(36)는 자신이 근무하는 의성군 단촌면 삼성산업 기숙사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는 “밤새 하늘이 빨강색이었다”며 “회사와 기숙사 건물 안팎이 모두 연기가 잔뜩 퍼져서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언제 대피하라고 할지 몰라서 짐부터 챙겨두고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고 말하는 범나투의 마스크 바깥쪽은 검은 그을음으로 얼룩졌다. 이어 “괜히 걱정할까봐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불이 났단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고 했다.

23일 정오 기준으로 의성실내체육관에는 의성읍고 정국면, 옥산면 등 주민 169명이 대피 중이다. 의성군은 추가 대피에 대비해 의성고등학교에도 텐트 50동을 설치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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