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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승부' 주연 배우 이병헌 인터뷰

영화 '승부'에서 바둑황제 조훈현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26일 개봉하는 영화 '승부'는 한국 바둑계의 전설 조훈현과 이창호 간 운명적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이병헌은 "바둑의 신과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은" 자신감으로 '바둑 황제'에 등극한 조훈현을, 유아인은 스승 조훈현을 넘어서는 '바둑 천재' 이창호를 연기했다. 영화는 한 지붕 아래 살아온 사제지간이지만, 프로의 세계인 바둑판에선 서로를 반드시 이겨야 하는 둘의 숙명적 고뇌를 드라마틱하게 담아낸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에 이어 또 다시 실존 인물을 연기한 이병헌은 2대8 가르마, 치켜 올라간 눈썹, 검지와 중지로 턱을 괴고 다리를 떠는 습관 등 조훈현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낸다.
21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조 국수(조훈현)를 만나 그의 성격과 심성, 버릇 등을 관찰했다"며 "다큐멘터리와 사진에서 본 모습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촬영 직전에도 또 한 번 본 뒤 그대로 했는데, 예고편을 본 조 국수가 ‘나인 줄 알았다’고 하셔서 다행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 '승부'에서 바둑황제 조훈현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그는 ″바둑 자체보다는 조훈현의 인간적 감정선을 세밀히 표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배우가 바둑돌 만은 제대로 잡게 해달라"며 영화화를 허락한 조훈현의 부탁에 따라, 이병헌은 프로 바둑기사에게 교습을 받으며 자세를 익혔고, 집에 바둑판을 들여놓고 연습을 이어갔다. "놓아진 바둑돌을 건드리지 않은 채 거침없이 돌을 놓고, 능숙하게 상대 돌을 가져가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병헌은 영화가 바둑 자체보다 사제 관계에 중점을 둔 작품인 만큼 조훈현의 감정선을 잘 표현해내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키운 '호랑이 새끼'에게 일격을 당한 충격과 좌절 등 조훈현이 겪었던 감정을 연기 고수 답게 실감나게 표현해낸다. 1990년, 15세의 이창호가 스승이자 바둑 황제인 조훈현을 꺾은 건 바둑계의 쿠데타 같은 사건이었다.

영화 '승부'에서 어린 이창호(김강훈, 오른쪽)와 바둑을 두고 있는 조훈현(이병헌).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승부'는 바둑황제 조훈현(오른쪽)이 제자 이창호에게 패한 충격을 딛고 재기에 성공해 도전자로서 이창호와의 대결에 나서는 과정을 그렸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이병헌은 특히 적수가 없다고 자신했던 조훈현이 제자에게 패한 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장면에 심혈을 기울였다. "영화의 핵심 정서를 보여주는 장면"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몰려든 기자들에게 "가르칠 게 더 이상 없네요"라고 말한 뒤 도망치듯 대국장을 빠져나온 영화 속 조훈현의 표정엔 충격, 당혹감, 허탈함 등 다양한 감정이 읽힌다.

"조 국수가 그 때 질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그가 느꼈을 여러 감정을 연기하려 했는데, 어떻게 보여줘야 할 지 고민이 깊었죠. 연기해도 뭔가 만족스럽지 않고, 이게 맞나 라는 물음이 계속 떠올랐어요. 다르게 해보고 싶다는 욕심에 '한번 더' 하면서 감독에게 여러 번 부탁했습니다."

이병헌이 그려낸 자신의 과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훈현은 영화 시사를 본 뒤 "그때 내가 저랬지"라며 회상에 잠겼다고 한다. 극 중 조훈현이 이창호를 엄하게 가르치는 장면을 보고는 “난 저렇게 디테일하게 가르치지 않았다. 창호 스스로 그 위치까지 올라간 것”이라고 말했다고 이병헌이 전했다.

조훈현은 제자에게 패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대국도 포기할 정도로 방황한다. 그러다가 '바둑은 냉혹한 승부이자 자신과의 싸움'이란 초심을 되찾고 도전자의 입장에서 다시 제자와의 대결에 나선다. 이 작품이 바둑 영화가 아닌, 실패와 좌절을 극복한 인물의 성장 영화로 읽히는 이유다. 이병헌은 “바둑 자체가 중요한 영화라면 출연을 고민했을 것”이라며 “결국 사람과 인생에 대한 얘기”라고 말했다.

영화 '승부'에서 바둑황제 조훈현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한국 바둑계의 전설 조훈현(왼쪽)과 포즈를 취한 배우 이병헌. 이병헌은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을 연기했다.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조훈현이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선 것처럼, 이병헌도 그런 실패의 시간을 겪었다고 했다. 1990년대 TV드라마에선 인기를 누렸지만, 영화에서는 데뷔작 '런어웨이'(1995)를 비롯, 네 편 연속 흥행에 실패해 ‘국밥 배우’로 불렸던 흑역사를 떠올렸다.
“최근 제 커리어를 보면 사랑받은 작품이 많지만, 저는 90년대 충무로에서 절대 쓰면 안되는 배우였어요. 신인이 영화 두세 번 망하면 캐스팅을 아예 안하는 룰 같은 게 있었는데, 저는 네 편을 연속해 말아 먹고도 운 좋게 다섯 번째 영화에 캐스팅됐어요. 개인적으론 4전5기인데, 충무로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히죠(웃음).”

이병헌은 다섯 번째 영화 ‘내 마음의 풍금’(1999)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뒤, ‘공동경비구역 JSA’(2000), ‘번지점프를 하다’(2001) 등을 잇따라 흥행시키며 충무로 연기파 배우로 자리잡았다.
자신을 ‘영화배우 이병헌’으로 소개하는 게 무척 기뻤다는 그는 TV드라마,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시리즈보다 영화가 더 좋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극장에 데려갔던 아버지의 영향 덕분”이라며 “극장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 지금도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우여곡절이 많던 이 영화를 OTT가 아닌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 선보이게 돼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승부’는 유아인의 마약 파문으로 개봉이 미뤄진 채 OTT로 직행할 뻔하다가 신생 투자배급사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배급을 맡으면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게 됐다. 이병헌은 “지금 가장 힘든 건 그 친구(유아인)일 것”이라며 “이창호의 돌부처 같은 캐릭터를 놓치지 않으려고 현장에서도 과묵하게 있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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