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여의'도'와 용'산'의 '공'복들이 '원'래 이래? 한국 정치의 중심인 국회와 대통령실에서 벌어지는 주요 이슈의 뒷얘기를 쉽게 풀어드립니다. "제발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여주길 바란다."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이재명 대표가 공개적으로 명확하게 승복 메시지를 내지 않는 것은 결국 헌재를 향한 겁박을 하는 게 아닌가."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여야는 지난 일주일 동안 앞다퉈 "승복"을 외쳤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2일 유튜브 방송에서 승복 질문을 받고 "안 하면 어찌할 것이냐"면서 에둘러 답하며 물꼬를 트자,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다음 날 승복을 선언했습니다. 여야가 탄핵심판을 둘러싸고 각기 다른 결론만 주창하면서 불복 사태까지 우려됐던 만큼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야가 상대당의 승복 선언을 깎아내리며 서로를 '불신지옥'에 빠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승복을 말해도 진정성이 없다고 힐난하거나,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면서요. 선고 목전까지도 여야가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뜻을 함께 하기보다는, 서로를 폄하하는 목적에만 골몰하는 모습입니다.
8년 전 여야 토론도 없이 "공동 승복 OK"
정세균 국회의장(가운데)과 국민의당 주승용(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새누리당 정우택,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2017년 2월 1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서 오찬 회동을 앞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8년 전 여야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당시는 여야 공동 승복 선언도 나왔을 만큼, 지금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탄핵 선고 한 달 전인 2017년 2월 13일
정세균 당시 국회의장이 여야 4당 원내대표를 불러 모았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한창 진행되던 때로, 재판이 막 후반부로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직전 주말에 열렸던 촛불집회에는 75만 명이 참석하면서 일주일 전(35만 명)보다 참석자가 2배 이상 뛰며 촛불민심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정 의장은 그 자리에서 국론 분열을 우려하면서 초당적 승복 합의를 제안했습니다. 당시 회동 참석자는
"의장이 이대로는 국론이 분열될 것이 자명하다고 여야가 이 정도는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승복을 꺼냈다"며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얘기라 다들 '아,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고 동의했다"
고 회고했습니다. 회동 전 별다른 물밑 교감이 없었음에도 아무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고, 토론 없이 단박에 구두 합의를 도출했다고 합니다.심지어 여당인 정우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회동에 앞서 가장 먼저 승복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정 원내대표는 당일 아침 원내대책회의에서 "탄핵 심판 결과에 절대적으로 승복할 것을 선언해야 한다"며 "승복하지 않는 대선 후보는 반헌법 인사로 규정해 후보 자격을 부여하지 말 것을 합의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렇듯
지금의 여의도는 상상조차 못 할 8년 전의 전설은 허탈하리만큼 쉽고 간단하게 성사됐습니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상식'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당시 여의도에는
탄핵 민심을 무겁게 여기는 '정치적 감수성'
이 살아 있었다는 분석
입니다.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단 소속이었던 전직 의원은 "광장이 불어나는 속도를 보면 여당이 불복을 말할 상황도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8년 전 탄핵 찬성 여론은 선고 직전까지도 70% 후반대로 일방적으로 치우쳤습니다. 이에 실제로 여당 내에서도 탄핵 인용을 전망하는 기류가 높았고, 설사 기각되더라도 '4월 퇴진-6월 대선' 카드를 거론할 정도로 정권 연장이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2017년 2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15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홍인기 기자
그렇다보니 여당도 야당만큼 탄핵에 진심으로 나섰습니다. 2016년 12월 9일 박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때 동의한 새누리당 의원은 '최소 62명'으로 추려집니다. 야당 역시 여당이 없었다면 탄핵이 어려웠다보니, 여당을 파트너로 존중했습니다. 친정에서도 등을 돌리니 탄핵 대상자인 대통령의 대응도 상이했습니다. 당시는 박 전 대통령을 찾아가는 여당 의원들도 없었을뿐더러, 박 전 대통령 스스로도 탄핵심판에 일절 나오지 않은 채 사저에 칩거하면서 몸을 낮췄습니다.
아울러 여야가 쌓아왔던
'신뢰 자본'이 비결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당시 정세균 의장실에 근무했던 관계자는 "그때의 정치와 지금의 정치는 많이 다르다"며 "매주 월요일 오전마다 정세균 의장이 여야 원내대표단 회의를 같이하면서 대화 분위기를 이어왔다"고 설명했습니다. 반목하고 충돌하더라도 어떻게든 한자리에 모여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갔던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협치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상대당 승복 폄하보다는 환영을
이재명(왼쪽)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9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부근 광화문 민주당 천막농성장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이 대표 상의 안쪽에 방탄 조끼가 보인다. 고영권 기자
반면 지금은 그와는 비교도 안될 극한의 대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여당을 '가해자'로 규정하면서 승복 요구에 거부감부터 표했습니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
가해자인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왜 피해자인 민주당에게 '너네도 승복해'라고 강압하느냐
"고 격분했습니다. 반면 국민의힘은 정작 윤 대통령에게는 승복을 요구 못 한 채,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이 대표만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윤 대통령의 승복을 요구한 여권 인사는 유승민 전 의원,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등 극소수에 불과합니다.물론 양측의 의심대로 현재 여야의 승복 선언에는 정략적 성격이 다분합니다. 각자 지지층의 기대를 한껏 담아 그들이 원하는 결론이 나올 것이라 다독이려는 측면 또한 강하죠. 아울러 헌정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치세력으로 상대를 악마화하는 여론전도 계산하고 있을 겁니다.
권영세(오른쪽)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권성동 원내대표. 뉴시스
하지만 의도가 마냥 순수하지 않다 해서 일부러 그 점을 부각시키면서 힐난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제대로 된 선언이 아니라고 규정할수록, 상대에게 발언을 뒤집을 여지만 더 주기 때문이죠. 오히려 상대당이 어떤 목적에서든 '승복'이라는 발언을 남겼다는 점을 못 박는다면 어떨까요. 또 차제에 이번 승복 선언을 발판 삼아 지지자들 간의 물리적 충돌 방지 약속까지 얻어낸다면 어떨까요. 8년 전 여야 간 상식과 신뢰가 기능했던 그때처럼, 지지층에게만 향했던 시야를 이제는 한층 넓혀야 할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