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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식 추기경(오른쪽)이 2022년 8월 27일(현지시간)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서임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왼쪽)으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되고 있다. EPA연합뉴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이 21일(현지시간) 헌법재판소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가 지연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며 지체하지 말고 “정의의 판결”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유 추기경은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며 비상계엄이라는 위헌적 행위에 대한 잘못을 명백히 가려줄 것을 요청했다.

유 추기경은 이날 가톨릭평화신문 등에 담화문을 내고 “위기의 대한민국을 위한 갈급한 마음으로 헌재에 호소한다”며 “우리 안에, 저 깊숙이 살아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며 “이와 마찬가지로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정의의 판결을 해달라”고 헌재에 거듭 호소했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 연합뉴스


유 추기경은 담화문을 발표한 배경에 대해 “여러 언론 종사자와 사회 지도층, 종교계로부터 교황의 건강에 대한 우려와 함께 비상계엄 후의 우리나라의 무질서하고 어려운 현실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표명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과 양심이 사회의 근본이 돼야 함에도 법을 가볍게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특히 사회지도층이 법과 정의를 지키지 않고 있다며 이러한 현실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또한 헌재의 선고 지연으로 극도의 혼란과 불안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며 갈등이 깊어지면 공영의 길이 멀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조속히 회복될 수 있도록 헌재가 신속히 판단을 내려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내린 이들에 대한 책임을 명백히 밝혀달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유 추기경은 2021년 6월 한국인 성직자로는 최초로 교황청 장관에 발탁됐고, 2022년 5월29일 한국인 네 번째로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유흥식 추기경의 담화문 전문>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수도자, 형제자매님들, 동포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저와 가까운 언론에 종사하는 분들, 사회 지도층과 종교계의 많은 분이 저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건강을 걱정하고, 비상계엄 후의 우리나라의 무질서하고 어려운 현실에 대하여 저의 솔직한 의견을 표시해 줄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라는 깊은 사고와 기도를 하였습니다.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현재 88세의 고령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신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의사들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시면서 자신이 겪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하느님께 바쳐드리며 치료받고 계십니다. 병이 호전되어 곧 교황청으로 돌아오실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의 건강이 하루빨리 회복되길 염원하는 전 세계의 많은 분의 간절한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계속된 기도를 통해 교황님의 심신의 회복을 간구합니다. 아울러 여러 면에서 고통 중에 있는 세계의 모든 아픈 이의 회복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교황님은 이미 이 세계의 고통을 치유할 가르침을 주셨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교황님께서 현대인들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가르침을 몇 개 되새겨 봅니다.

첫째, 교황님은 끊임없이 넓은 마음을 가져 달라고 촉구하셨고,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주님 품에 안기기 전까지 안식은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삶은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이해와 충돌 사이에서 사랑에 기반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이 없이 고통은 가중될 것입니다.

둘째, 서로 존중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그래서 개개인이 사람마다, 또 그가 속한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기본값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셋째, 어려운 이들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촉구하셨습니다. 세계가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가장 먼저, 가장 깊이 고통받는 사람은 평화로운 시절에도 어려웠던 사람들입니다. 개인의 문제보다 구조적으로 가난하고 힘겨운 삶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이들에 관한 관심과 보살핌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이런 생각의 끝에서 제가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을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말 고국에서 벌어진 계엄 선포라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하고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국회가 신속하게 계엄해제를 의결함으로써 국가적 비극으로 치닫는 일은 일단 멈추었고 수많은 국민이 추위를 뚫고 광장과 거리로 나와 함께 하면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벌써 시간은 혹한을 지나 3월 하순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상황은 마무리되지 않은 채 국민의 마음은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습니다.

법은 상식과 양심으로 해결이 안 되는 일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인간 사회의 최후 보루입니다. 따라서 되도록 상식과 양심 안에서 해결될 수 있어야 좋은 사회입니다. 성서의 히브리서에는 다섯 차례 양심에 대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9장 9절에서는 현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온전하지 못한 양심’을, 9장 14절에서는 ‘구원받은 양심’을, 10장 2절에서는 ‘죄의 양심’을, 10장 22절에서는 ‘깨끗해진 양심’을, 13장 18절에서는 어느 때고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하는 ‘바른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양심이라는 말이 빛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미 법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마음을 넘어, 법을 가볍게 무시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무서운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누구보다 정의와 양심에 먼저 물어야 하는 사회지도층이 법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위기의 대한민국을 위한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헌법재판소에 호소합니다. 되어야 할 일은 빠르게 되도록 하는 일이 정의의 실현이며 양심의 회복입니다. 우리 안에, 저 깊숙이 살아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의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정의의 판결을 해주십시오.

극도의 혼란과 불안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가족과 이웃이 싸우고, 수없이 많은 상점이 폐업을 하고, 젊은이들은 어디서 미래를 찾아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모두가 너나없이 ‘어려운 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돌볼 처지가 안 되면 사회는 더욱더 나밖에 모르는 일이 가속화되고, 인간이 서로를 돌보고 협력하지 못한다면 공영의 길은 점점 멀어집니다. 이제 올바르면서도 조속한 회복을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내린 사람들에 대한 시시비비를 명백히 밝혀주시길 촉구합니다.

저는 평생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매우 중요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이웃에게 주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정부는 국민에게, 국민은 각자의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려는 그 마음이 사랑이며 치유이며 회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어쩌면 모든 회복의 출발일지 모릅니다.

모두 각자의 양심에 기대어 한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바티칸에서 추기경 유흥식 라자로 드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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