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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그거 봤니? 폭싹 속았수다
‘폭싹 속았수다’ 1화. 죽음을 예감한 엄마가 애순에게 전복을 구워주며, 유언하는 장면. 집에 남아 식모살이하지 말고, 삼촌 집으로 돌아가라 한다. 넷플릭스 제공

‘폭싹 속았수다’(넷플릭스)가 탄핵 정국에 지쳐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안기고 있다. 임상춘 작가는 ‘동백꽃 필 무렵’에서 보여주었던 유머러스하고 인간미 넘치는 필력에, 시적이고 토속적인 제주 말맛을 살려 인생의 사계절을 풀어낸다. ‘미생’을 찍었던 김원석 감독은 손때가 묻어날 듯한 디테일한 연출로 그 시절을 살아낸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유, 박보검, 염혜란, 최대훈, 아역 김태연의 절정의 연기가 돋보이며, 도무지 연기의 구멍을 찾을 수 없다. 드라마는 순정남의 사랑 이야기이자, 1960년부터 2025년까지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여성 서사이고, 부모와 자식 간 사랑을 그린 가족 이야기다.

순정남의 사랑

‘폭싹 속았수다’를 보게 하는 가장 강력한 유인은 아이유와 박보검의 로맨스다. 시청자들은 이들의 귀여운 첫사랑에 낚여 심장을 저격당했다. 작가의 전작 ‘동백꽃 필 무렵’처럼, 여기도 지고지순한 순정남이 등장한다. 이번엔 더 심하다. 양관식(박보검)은 열살 때부터 오애순(아이유)만 쫓아다닌다. 뭘 자꾸 먹이고, 자발적 머슴 노릇을 한다. 자아실현의 꿈도 없다. 애순의 자아실현을 돕는 것이 꿈이다. 살아가는 이유의 ‘십할’이 애순이다. “섬놈에겐 시집 안 간다.” 막말하는 애순에게 화도 안 낸다. 양관식은 애순이 좋은 이유를 “똑똑하고, 잘 떠들고, 귀염상이라서”란다.

‘폭싹 속았수다’ 1화. 열살 무렵의 양관식이 오애순을 따라다니며, 먹을 것을 갖다 주는 장면. 이후로도 계속 성실하게 잘해준다. 넷플릭스 제공

양관식이 애순을 좋아하는 이유와 방식은 전통적인 이성애 레퍼토리와 다르다. 전통적인 이성애에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는 여자가 ‘예쁘고 말이 없는’ 객체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의 능력과 야망을 인정하여 사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남자가 많은 자원을 가진 상태(실장님 혹은 왕자님)에서 여자를 보살펴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자의 순정은 파괴적이고 비극적으로 재현된다.

이를테면 “나랑 밥 먹을래, 나랑 죽을래?”(‘미안하다 사랑한다’) 하며 폭주하거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넌 내 여자니까”(‘모래시계’) 식의 순정 마초의 남성 신파를 찍는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을 믿고 돌진하며, 심하면 강요와 협박을 자행한다. 약탈혼의 변형이다.

‘폭싹 속았수다’ 2화. 오애순과 양관식이 집안 패물을 훔쳐 야반도주한 장면. 두 사람은 신혼부부로 위장해 부산에 도착하지만, 곧 위기를 맞는다. 넷플릭스 제공

반면 양관식은 오애순에게 끊임없이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잘해준다. “먹이기만 하고 당최 꼬시지를 않는다” “별도 달도 따준다는 구라는 못 친다”라는 것이 오애순의 불만거리지만, 충직함의 징표다. 양관식의 사랑은 ‘옥씨부인전’의 천승휘의 사랑과 더불어, 여성을 주체로 인정하고, 꾸준한 구애로 상대에게 신뢰를 얻어 ‘여성의 선택’을 받고자 하는 새로운 이성애 모델을 제시한다. 찰스 다윈의 성 선택 이론에 부합하는 방식이다.

가난·차별 헤쳐 나간 여성 3대의 서사

제주에서 여자로 나느니, 소로 태어나는 것이 낫단다. 어미는 해녀였다. 광례는 애순 아빠가 죽자, 애순을 시가에 떼어놓고 재가했다. 새 남편은 한량이었다. 광례는 물질하고 살림하며 애를 둘이나 더 낳았다. 애순은 엄마가 보고 싶다며 툭하면 재를 넘어왔다. 공부 잘하는 애순을 삼촌은 구박했다. 제 아들 “장손 종구”의 운을 다 가져간다고. 밥상 차별을 당한다는 애순의 말에 격분한 광례가 애순을 집으로 데려온다.

애순은 꿈이 크다. “뭐든 다 해 먹겠다”라는 애순이 부당하게 급장을 빼앗기자, 광례는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애순이 “부급장도 괜찮더라”라고 타협하려 하자, “엄마가 가난하지 네가 가난한 것이 아니다. 너는 푸지게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런 광례가 잠수병에 걸려 죽는다. 애순은 의붓아버지가 대학 보내준다는 말을 믿고, 이부동생 둘을 키웠다. 그러나 애순이 18살 때, 의붓아버지의 새 아내가 임신해서 집에 들어오자, 애순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다. 삼촌 집은 종구의 도박으로 가세가 기울었다. 삼촌은 애순에게 부산의 기숙 공장에 들어가라 한다. 애순은 삼촌 말을 거부하고 양관식과 양가 패물을 훔쳐 야반도주한다.

어디서 들어보았음 직한 옛날이야기다. 하지만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관점이 낡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회고적인 관점으로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적 비판의 관점으로 과거를 기술한다. ‘두번 결혼하고 몸을 혹사하다 29살에 죽은 해녀’ 광례는 단지 ‘팔자 나쁜 여자’나 ‘가련한 희생자’로 그려지지 않았다. 가난과 차별로 고생했지만, 광례가 딸에게 들려주는 해녀의 말에는 극한의 환경에서 노동하며 깨달은 이의 강인함과 숭고함이 담겨있다. 딸에게는 가난과 차별을 물려주지 않으려 한 엄마의 극진함이 있다.

‘폭싹 속았수다’ 3화. 오애순이 부선장의 재취로 시집 갈 작정으로, 선을 보는 장면. 이후 두 사람은 악연으로 얽힌다. 넷플릭스 제공

오애순의 삶은 어떤가. 당시 애순과 같은 상황에서 삼촌 말처럼 기숙 공장에 가서 월급의 반을 집으로 부치는 딸들도 많았다. 집안이 잘되어야 너도 잘된다는 말을 내면화한 채. 하지만 애순은 가출을 택한다. 이 일로 애순의 신세는 벼랑 끝에 내몰린다. 남학생은 정학이지만, 여학생은 퇴학이란다. 양관식의 집에서는 고아에 중졸 며느리는 싫단다.

갈데없는 애순은 급기야 부선장(최대훈)에게 재취로 시집갈 위기에 처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양관식과 결혼한다. ‘시인이 되길 꿈꾸었으나, 고등학교도 퇴학당하고 일찍 결혼한 여자’라니. 기존의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보자면 애순은 쉽게 대상화되는 존재다. 삼촌의 시각이나 부선장의 시각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오히려 애순을 대상화하는 시선을 역으로 돌려준다. 드라마는 부선장과 처음 만난 자리의 싸한 지점을 섬세하게 그린다. 마치 저런 남자를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듯이.

드라마는 애순의 시집살이에서 몸이 힘든 것보다 여성 혐오가 진짜 힘들었으며, 특히 딸에게 여성 혐오가 전수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애순은 시할머니가 애순에게 붙은 엄마 귀신을 쫓는다며 뿌린 팥이 딸 금명에게 맞지 않도록 막는다. 시할머니가 금명에게 자전거를 못 타게 하자 “여자가 자전거도 못 타면 평생 아궁이 앞에서 살아야 한다”라며 반기를 든다. 급기야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어린 금명을 해녀로 만들겠다는 시할머니의 제사상을 둘러엎고 분가한다.

‘폭싹 속았수다’ 4화. 시할머니가 어린 금명을 해녀로 만드는 제를 올리려 하자, 애순이 제사상을 둘러엎는 장면. 이 일로 부부는 무일푼으로 분가한다. 넷플릭스 제공

한동안 ‘넌 엄마처럼 살지 마’ ‘난 엄마처럼 살진 않을 거야’ 돌림 노래를 부르며 애증으로 얽히는 모녀 서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런 서사는 출구 없는 여성 혐오를 재생산할 뿐이다. 그러나 ‘폭싹 속았수다’는 엄마가 딸에게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길을 열어주고, 딸은 악전고투했던 엄마의 삶을 존중하며 자신의 한발을 내딛는 모녀 서사다. 애순은 딸을 서울대에 보내고, 집을 팔아 유학 보낸다. 자신도 어린 시절의 야망을 잃지 않고, 어촌계장이 된다. 그것도 마초 빌런 부선장을 누르고.

임상춘 작가는 ‘동백꽃 필 무렵’에서 술집을 하는 미혼모 동백과 술집 종업원 향미를 그렸다. 이들은 기존의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풀어내기 어려운 인물처럼 보였지만, 그들을 저항적 주체로 그려냈다. 광례와 애순도 언뜻 여성주의적 주체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여성들을 주인공 삼아 끊임없이 여성주의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3대에 이르러 양금명은 드디어 1990년대 엘리트 여성이 된다. 하지만 예비 시모를 만난 자리에서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의 내조에 전념하라는 말을 듣는다. 하기야 ‘82년생 김지영’도 성차별을 당했는데, 69년생 양금명에게 성차별이 없었으랴. 당시는 대기업이 막 대졸 여사원을 뽑기 시작한 때이며, 엘리트 여성들은 그나마 성차별이 적은 직종인 교사, 약사, 공무원, 의사, 변호사 등으로 진출했다. 69년생 양금명이 차별과 결핍을 뚫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어떤 삶으로 나아갔을지 앞으로의 회차가 기대된다.

‘폭싹 속았수다’ 6화. 오애순과 양관식이 막내를 잃고 망연자실한 장면. 부부는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산 자식들을 챙기기 위해 일어선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여러 층위로 그린다.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맞다. 하지만 부모가 준 단단한 사랑으로 자식은 자신의 존엄을 지탱한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함부로 내팽개치지 않는다. 애순이 싸한 선 자리에서 엄마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나, 금명이 불법적인 제안을 받았을 때 부모를 떠올리며 거절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 품에서 놓친 자식을 가슴에 묻고, 남은 자식들을 챙기기 위해 털고 일어났지만, 평생 냉가슴 앓는 부모의 심경까지 담아내다니, 얼마나 두터운 텍스트인가.

어쩌면 굉장히 영리한 기획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청취자 사연 같은 회고담을 근간으로 하되, 그것을 차별에 저항했던 여성의 서사로 써 나감으로써, 올드하지 않은 시대성을 갖추었다. 풋풋한 첫사랑과 순정남 이야기로 재미와 매력을 잡고, 보편적인 가족애로 심금을 울린다. 옛이야기가 주는 친근함과 향수도 챙기면서, 여성주의적 시대 정신을 만족시켜 세대 공감과 젠더 화합을 이루다니, 가히 천재적이라 말씨.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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