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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의 파격 인사… “오랜 전통은 관료화의 다른 말”
생태계 중심의 파운드리, 최적 CEO는 외부인
“삼성전자, 메모리 중심 엘리트주의 버려야”
이재용 “메모리사업부 자만 빠져” 질책

립부 탄 인텔 신임 최고경영자(CEO)./인텔

인텔이 57년 역사상 처음으로 비(非)인텔 출신 최고경영자(CEO)인 립부 탄을 수장으로 선임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습니다. 인텔 역사상 첫 아시아계 CEO이기도 합니다. 경영난에 빠진 인텔 이사회가 ‘백인’ ‘인텔 출신’ 등의 전통을 깨고 가장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밥 스완 전 인텔 CEO도 외부 영입 사례로 꼽히지만, 인텔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거친 뒤 내부 승진으로 CEO에 오른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비인텔 출신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인텔과 접점이 없던 외부 인사를 CEO에 앉히려는 인텔의 파격적 시도는 립부 탄 CEO와 함께 마크 리우 전 TSMC 회장까지 신임 CEO 후보로 거론됐다는 점을 보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인텔의 이 같은 선택은 50년 넘게 지켜온 유구한 전통이 달리 말해 일종의 ‘관료주의’였고, 이것이 인텔의 혁신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 셈입니다. 이는 인텔과 함께 세계 최대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에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삼성전자 역시 메모리사업부 출신이 DS(반도체)부문장을 비롯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스템LSI 등의 수장을 차지하는 유구한 전통을 지켜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텔은 왜 EDA 기업 수장을 선택했나
한때 적수가 없었던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 인텔이 어쩌다 경영난에 허덕이며 매각까지 거론되는 신세가 됐는지 짚어봐야겠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인텔이 휘청거리기 시작한 가장 큰 원인은 다름 아닌 인텔이 자랑해온 제조 공정 기술이었습니다. 2010년대 중반 14나노 공정에서 10나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경쟁사 대비 현저하게 느린 속도가 문제였습니다. 이는 극단의 재무 중심적 경영을 펼쳤던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전 CEO와 이사회의 뼈아픈 실책으로 회자됩니다.

회사의 부활을 외치며 인텔은 전설적인 엔지니어 출신 팻 겔싱어를 수장에 앉히고 한동안 순항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문제는 공정에서 나타났습니다. 대만 TSMC가 세계 첨단 공정의 대부분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인텔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와 같은 초고가 장비를 대거 구매하면서 파운드리 분야에 대대적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다만 비즈니스 전략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인텔파운드리서비스(IFS)를 야심차게 출범했지만 이렇다 할 대형 고객사 유치에는 실패했습니다. 수주형 산업인 파운드리의 특성을 감안하면 인텔이 공정 고도화보다는 파운드리 생태계 조성에 더 힘을 실어야 했다는 질책이 나옵니다.

세계 양대 반도체설계자동화(EDA) 기업인 케이던스를 이끌었던 립부 탄 CEO를 선임한 것도 결과적으로 파운드리 분야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한 조처로 분석됩니다. EDA는 반도체 집적회로(IC) 디자인을 설계·검증할 때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말합니다. 칩을 만들기 전에 다양한 회로 설계를 시뮬레이션해 보고 결과를 예측하는 기술입니다. 미세공정 기술이 한계에 치닫고 있는 요즘 EDA 기술력이 설계, 제조, 수율 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성이 높아졌습니다. 특히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공정 최적화를 위해 EDA가 다양하게 활용됩니다.

인텔 오레곤 공장./인텔 제공

립부 탄 CEO의 선임으로 인텔은 이제 더욱 다양한 반도체 IP(설계자산), 팹리스(설계전문), 파운드리 등과 밀접한 파트너십을 맺어온 케이던스의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파운드리 사업에서의 성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생태계 조성의 기반을 다지게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인텔이 오랜 전통을 깨고 ‘아웃사이더’에 회사의 운명을 맡기게 된 배경입니다.

삼성 파운드리 전성기는 TSMC 출신이 활약하던 시절
인텔의 사례는 여전히 순혈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삼성전자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삼성전자의 경우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시작으로 시스템LSI, 파운드리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왔지만, 외부 인사를 DS부문 수장에 앉힌 사례는 찾기가 힘듭니다. DS부문장은 모두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출신이며, 업력이 짧은 파운드리사업부 역시 메모리 반도체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사들이 사업부장에 임명됐습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가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외부 인력을 적극 영입하고, 리더십에도 파운드리 분야에 특화한 인사를 데려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에 정통한 관계자는 “과거 삼성 파운드리가 TSMC의 지위를 크게 위협했던 건 2014년 14나노 핀펫 공정 단 한 번뿐인데, 이 시기에 삼성 파운드리의 신기술 안정화를 진두지휘했던건 TSMC 출신 양몽송 부사장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손꼽히는 엔지니어인 양몽송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삼성 합류 2년 만에 14나노 핀펫(fin-FET) 공정 양산을 이끌었던 주역입니다. 당시 삼성전자는 처음으로 TSMC를 제치고 애플, 퀄컴 등 주요 고객사의 물량을 따내기도 했습니다. TSMC, UMC, 글로벌파운드리에 이어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4위(5%)였던 삼성 파운드리는 이후 14나노 핀펫 공정을 기반으로 11나노, 10나노 등을 연달아 내놓으며 점유율을 15% 이상으로 끌어올린 바 있습니다. 양 부사장이 중국 SMIC로 자리를 옮긴 후 삼성 파운드리는 더 이상 TSMC를 위협하는 공정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순혈주의와 관료화된 조직 구조를 바꾸고, 더 유연하게 시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파운드리뿐만 아니라 메모리, 설계 등 모든 분야에서 더 많은 ‘아웃사이더’가 활약하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최근 이재용 회장은 이례적으로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에 대한 일침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 회장은 “메모리사업부는 자만에 빠져 AI(인공지능) 시대에 대처하지 못했다”며 “파운드리사업부는 기술력 부족으로 가동률이 저조하다”고 질책했습니다. 이 회장의 질책성 발언이 실천으로 이어져 관료화된 삼성 반도체의 리더십 체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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