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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소방관들이 러시아 공습을 받아 폐허가 된 수미 지역에서 건축물 잔해를 처리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전쟁은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슬픔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큰 기회를 주기도 한다. 3년여에 걸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이 때문에 ‘제2의 마셜플랜’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는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역시 주목받고 있다.

올해 2월 발표된 ‘4차 긴급 재건피해 및 수요조사’(RDNA4) 기준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은 10년간 총 5240억 달러(약 750조원) 규모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이 시장을 두고 세계의 ‘장사꾼’'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먼저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 지원 규모가 큰 미국과 유럽이 금융 조달을 중심으로 관련 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워낙 사업규모가 크기에 여전히 기회는 보인다. 특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국내 건설업계에 ‘우크라이나 재건 특수’라는 재료는 호재다. 건축, 토목, 인프라에서 그동안 쌓아온 트랙 레코드도 충분하다. 이미 일부 기업은 폴란드 등 우크라이나 인접 국가에 세운 지사를 중심으로 현지 기업 및 기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있다.

다만 진입 시기는 불분명하다. 전후 복구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개별 기업 차원에서 진입할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 부동산 시장이 침체를 이어가고 네옴시티 등 중동특수도 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 희망고문이 될 수도 있다.

주택·인프라·에너지 복구 필수
지난해 11월 리빌드 우크라이나 박람회 기간 중 현대건설은 우크라이나 전력공사(Ukrenergo)와 송변전 신설 및 보수공사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14일에 진행된 협약식에는 우크라이나 에너지부 게르만 갈루쎈코(German Galushchenko) 장관, 우크라이나 전력공사 볼러디미르 쿠드리트스키(Volodymyr Kudrytskyi) 사장, 현대건설 뉴에너지사업부 최영 전무 등이 참석했으며, 향후 우크라이나 전력공사가 추진하는 약 1조원 규모의 송변전 사업 참여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사진=현대건설

유엔과 세계은행,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와 우크라이나 정부가 공동발표한 RDNA4에 따르면 가장 비중이 큰 재건사업은 주택부문으로 840억 달러(120조원)가 투입돼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운송에 780억 달러(110조원), 에너지·채굴에 680억 달러(97조원) 비용이 필요하다. 산업시설 재건에도 640억 달러(91조원)를 들여야 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체 주택 중 13%가 피해를 입었으며 운송 부문의 피해는 주로 도로, 교량, 철도 등의 인프라 파괴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재건사업의 최대 수혜주는 건설기계, 건설업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법무법인 율촌 조은진 러시아 변호사는 “굴착기 같은 국내 중장비는 퀄리티가 좋고 유럽보다 메리트 있는 가격으로 경쟁력이 있다”며 “대기업 계열사인 대형 건설사들도 현지에 지사나 법인을 설립하는 등 우크라이나 진출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우크라이나 재건 수혜 기업으로는 이미 현지에 진출해 점유율 20%를 차지하고 있는 HD현대사이트솔루션 및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옛 두산인프라코어), 전진건설로봇 등 건설기계 회사가 꼽힌다. 이들 기업은 종전 관련 협상 결과에 따라 주가가 출렁이기도 했다. 국내 최대 아스콘 회사이자 유일한 상장회사인 SG도 수혜주에 포함된다.

건설사 중에선 현대건설, 삼성물산, 대우건설 등이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현대건설은 2023년 우크라이나 공기업과 총 4개 업무협력, 협력 의향서에 서명했다. 2023년 4월 미국 홀텍인터네셔널과 팀을 이뤄 우크라이나 원자력 공사와 소형모듈원전(SMR) 건설 협력 계약을 체결했다. 7월에는 보리스필 국제공항공사와 공항 확장공사 협약을 맺기도 했다. 이 밖에 11월과 12월 우크라 전력공사, 원자력공사와 각각 송변전공사 업무협약, 원전사업 협력의향서를 체결했다.

삼성물산은 같은 해 7월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시와 스마트시티 개발 업무협약을 맺었다. 현대엔지니어링도 모듈러 사업, 석유화학단지 개발 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한국 정부는 2023년 7월 정상회담을 통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재건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9월에는 폴란드 바르샤바 현지에 ‘우크라이나 재건 협력센터’를 꾸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함께 폴란드를 방문한 기업들이 성과를 거둔 것이다.
돈 없는 발주처, 기회 제한적
이처럼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 주목하는 기업들 상당수는 폴란드 등 인접 국가에 지사를 설립하거나 현지 정부, 기업과 협력하고 있다. 국내 최대 건설사업관리(PM)업체 한미글로벌과 대형 설계사무소인 희림이 폴란드 지사를 설립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접해 있지만 나토 가입국으로서 안전한 곳이다. 우크라이나 피란민도 적극 수용하고 있어 재건사업 전초기지로 주목받은 지 오래다. 한국 회사들뿐 아니라 “재건사업에 관심 있는 기업들은 모두 폴란드에 모여 있다”고 할 정도다.

폴란드를 거쳐 우크라이나에 진출하는 장점은 또 있다. 당장 우크라이나 정부와 직접 맺은 협약의 실현 여부는 불투명하다. 우선 현 정부를 이끌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종전 후 실각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 지도부가 바뀌면서 그동안 젤렌스키 체제하에서 약속한 모든 것이 무효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더라도 우크라이나가 재건사업과 관련해 어느 정도까지 자발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공식적인 발주처는 우크라이나지만 미국과 EU, 국제기구의 금융지원 없이는 비용을 집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23년 1월 설립된 다자공여자공조플랫폼(MDCP)은 G7과 세계은행, IMF, 유럽부흥개발은행, OECD 등 국제금융기구들이 모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단기 재정지원은 물론 중장기 재건지원 계획을 조율하는 곳이다. 한국도 지난해 2월 MDCP에 가입했지만 영향력은 크지 않다. 이 같은 공적자금 투입만으로는 재건 비용을 모두 충당하기 어렵기에 민관협력사업(PPP)도 추진되고 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공항 건설과 전력망 구축 사업에 진출할 예정이지만 이제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어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다”며 “발주처인 우크라이나에 돈이 없는 상황이므로 미국이나 유럽의 금융지원에 따라 진출 시기가 정해지지 않을까 한다”고 설명했다.

재건사업 보증 프로그램도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고 있다. 미국 국제개발금융공사(DFC)와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이 대표적이며 폴란드 무역보험공사(KUKE)는 재보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투자가치의 90%까지 보장하는 상품을 내놓기도 했다.

러시아 시장, 진입 가능한가
결국 국내기업이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 삽을 뜨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의 ‘강대국 눈치보기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오랜 교전으로 피해 규모가 큰 러시아 점령지역에 대한 재건 사업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점령지역은 러시아와 관계 회복에 성공해야 진출이 가능하다.

한국은 전쟁 발발 이후 서방 국가들과 함께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고 러시아는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연간 23만 대 생산이 가능한 현대자동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러시아 현지 기업에 헐값에 대여된 상태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바탕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시장에서 꾸준히 점유율을 높여왔다. 러시아 정부와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도 유지했다. 따라서 기존의 현지 생산공장을 되찾고 러시아 점령지에 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23년 12월 크렘린궁에서 열린 21개국 대사 신임식에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회복은 한국에 달려 있다”고 발언했다.

문제는 시간이다. 한국은 러시아 진출에 있어서도 미국과 서방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다. 전쟁 지원규모가 적은 나라가 돈 버는 일에만 적극 나선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어서다.

재건사업을 위한 비용조달 속도가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이미 전쟁 당사국은 물론 주변국들도 전쟁 장기화에 따라 소모한 비용이 크고 안보 불안으로 인한 군비경쟁이 격화돼 자금 여유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재건사업과 국내기업의 기회’라는 보고서를 통해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시 지원금액이 큰 국가에 사업의 우선권이 주어져 상대적으로 사업기회 측면에서 열위에 위치할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 재정난, 인력 및 재건의 리소스 부족, 정부 및 공공부문의 부패 등 리스크 요인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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