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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정신과 의사의 코멘터리]
<2> 드라마 '멜로무비' 김무비·고겸

편집자주

정신건강의학과 김지용, 오동훈, 허규형 전문의가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우리의 마음도 진단합니다.
드라마 '멜로무비'의 김무비(박보영)와 고겸(최우식). 넷플릭스 제공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멜로무비'는 영화라는 소재를 통해 청춘의 사랑과 성장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제목부터 박혀 있는 멜로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낄 분들도 있겠지만 '멜로무비'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 김무비(박보영)와 고겸(최우식)이 보여주는 감정선과 선택들을 애착 외상이라는 심리학적 개념을 통해 분석하면, 드라마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 생긴 큰 상처 '애착 외상'



애착 외상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애착(Attachment)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존하고 성장하는 존재다.
애착은 특히 생애 초기, 부모와 같은 주 양육자와의 정서적 결속을 통해 형성되는 친밀한 관계를 의미
한다. 이러한 애착관계는 개인의 정서적, 사회적, 심리적 발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양육자와 안정된 애착을 형성한 아이는 ‘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건강한 자기감을 갖게 된다. 건강한 자기감은 곧 타인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져, 다른 사람들과 적절한 신뢰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애착 외상(Attachment Trauma)이란 중요한 애착 대상으로부터 겪는 심리적 충격을 의미
한다. 흔히 예상할 수 있듯 학대, 방임과 같은 상황은 물론 양육자와 장기간의 이별, 혹은 양육자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같이 물리적인 부재 상황 역시 아이에게 애착 외상을 남길 수 있다. 애착 외상을 겪은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한다. 아이는 세상이란 더 이상 자신이 필요할 때 보듬어주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아이는 스스로의 본모습을 감추고,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피해 도망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며 성인이 된 이후의 관계 형성과 자존감, 감정 조절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빠를 잃은 딸 '사랑하는 대상은 나를 떠난다'

드라마 '멜로무비'에서 김무비가 어린시절 겪은 아버지의 죽음은 애착 외상을 남겼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속 김무비는 어린 시절 영화인이었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한 후 ‘인생을 걸지 않아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감독이 되는 인물
이다.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무비’로 지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깊었다. 딸에게도 마찬가지로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지만, 딸과의 약속을 어기고 번번이 영화 현장으로 떠나곤 했다. 김무비에게는 마치 아버지의 사랑을 두고 자신과 이름이 같은 영화와 ‘경쟁’하는 상황이 태생적으로 주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아버지의 존재는 김무비가 원하는 만큼의 정서적 돌봄과 ‘나를 떠나지 않는’ 안전한 관계에 대한 경험을 주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김무비는 안정적인 애착 형성에 실패한다.

아버지의 사망은 김무비의 심리에 두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
첫째로는 애착 대상의 상실로 인한 애착 외상
이다. 원래도 단단하지 않았던 김무비의 애착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는다. 김무비의 마음속엔 ‘내가 사랑한 대상은 결국 나를 떠난다’라는 생각이 공고히 자리하게 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상실의 재경험을 피하기 위해 깊이 있는 관계를 꺼리는 대인 관계 패턴이 만들어졌다.

'멜로무비'의 김무비는 고겸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넷플릭스 제공


둘째는 아버지에 대한 해결하지 못한 감정과 이를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
이다. 김무비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을 거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애증이라는 서로 상반된 감정의 조합은 누구에게나 괴롭다. 상대가 살아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풀어나갈 수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다. 결국 이 감정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아버지와 유사한 대상을 찾아서 대리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어지고, 그것이 김무비를 ‘아버지를 닮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높은’ 영화계로 이끌지 않았을까.

고겸을 처음 만났을 때 무비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서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전이(Transference) 현상이다.
전이란 개인이 과거 중요한 애착 대상에게 느꼈던 감정과 욕구를 현재의 상대에게 무의식적으로 투사하는 심리적 현상
이다. 김무비는 고겸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따뜻한 성품에서 아버지를 느꼈고, 과거 충분히 해소하지 못한 아버지로부터 받고자 했던 애정에 대한 욕구를 고겸에게 투사하며 그에게 이끌렸다.

하지만 동시에 고겸에 대한 호감이 커져갈수록 또다시 중요한 관계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김무비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관계가 진전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걸며 애써 고겸을 밀어낸다. 고겸을 두고 김무비가 스스로의 마음과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이러한 심리가 작동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형과 단둘 남은 아이 '가짜 밝음' 가면

'멜로무비'에서 영화평론가가 된 고겸. 넷플릭스 제공


고겸은 어린 시절 부모를 사고로 잃고 형과 단둘이 살아가던 중, 영화라는 세계를 접하고 단역배우를 거쳐 영화평론가가 되는 인물
이다. 고겸에게는 든든한 보호자의 역할을 했던 형이라는 존재가 있었지만,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빴던 형에게 부모가 주어야 할 충분한 정서적 돌봄과 지지를 기대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이렇게 감정을 받아주는 애착 대상이 부재하면 아이들은 점차 솔직한 감정을 억압한 채 가면을 쓰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고겸이 선택한 것은 ‘가짜 밝음’이라는 가면
이었다. 밝은 모습을 보이면 형에게 ‘나는 잘 지내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 더 이상 걱정을 끼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해맑고 밝은 모습은 주변의 어른들, 친구들로부터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고겸의 이러한 연출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마음속 한편에는 깊은 외로움과 공허감이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겸은 성장 과정 내내 영화를 보는 일에 몰두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고통스러운 자신의 진짜 감정을 직면하지 않아도 되니까.

김무비를 만난 후 운명적인 끌림을 느낀 고겸은 저돌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고, 결국 깊은 관계를 만들지 않겠다던 그녀의 마음속 방어막을 뚫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 순간 형의 사고가 고겸의 발목을 잡는다. 형의 사고 이후 고겸은 김무비에게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대로 연락을 끊게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을 고겸의 행동은 애착 외상의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유일한 가족이자 정서적 버팀목이었던 형의 사고는 고겸에게 또 한 번 중요한 애착 대상과의 상실 위기로, 커다란 불안감과 두려움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고겸은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지만, 내면의 감정을 직면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기에 극단적으로 상황과 관계 자체를 회피하려는 성향을 보일 수 있다.
즉 고겸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무비와의 관계까지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좀 더 깊게 들어가보면 고겸의 마음속엔 형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이라는 감정이 존재했을 거라 생각된다. 이러한 무력감이 김무비와의 관계를 회피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멜로무비'의 김무비와 고겸. 넷플릭스 제공


새 관계는 옛 상처보다 강력하다



어긋날 것만 같았던 고겸과 김무비는 결국 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재회해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두 사람이 각자의 애착 외상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의 상처를 재경험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결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김무비는 갑자기 떠난 고겸으로 인해 상실의 고통을 다시 겪어야 했지만, 끝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는 경험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내면적 두려움과 근본적인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고겸의 존재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깊이 새겨진 상실의 트라우마를 옅게 만들고, 다시 사랑을 믿고 수용할 수 있는 정서적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한편
고겸은 김무비를 통해 자신이 가진 죄책감과 무력감,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회피하는 대신 솔직하게 표현하고 인정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김무비는 고겸의 내면에 숨겨진 어두운 부분과 고통스러운 감정까지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공감하며 지지해줬고, 이로 인해 고겸은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처음 진심으로 이해받고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멜로무비'의 무비와 고겸.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멜로무비'에서 김무비와 고겸의 애착 외상과 전이 감정은 이들의 서사를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게 만든다. 두 인물은 각자가 가진 상처로 인해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밀어내는 복잡한 과정을 겪지만, 결국 서로를 통해 내면의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와 성장이라는 중요한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이것이 '멜로무비'를 단순한 ‘멜로’만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애착 외상과 같은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는 분들을 진료실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상처를 준 대상에 대한 원망감에 붙잡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김무비와 고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었듯
내가 현재를 살아가며 새롭게 맺는 관계가 내면의 가장 깊은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동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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