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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나의 청춘은 광화문에서 시작해 광화문에서 끝났다. 우연히도 중고등학교가 거기 있었고, 대학 시절엔 서점과 주점을 찾아 그곳을 헤맸다. 치기를 감당하지 못한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끔 들려 이문세의 그 노래를 불렀다.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는’ 그 푸른 시간을 불러냈다. 광화문 도처에 남긴 내 청춘의 발자국이 조선과 근대 한국의 역사적 지층에 찍은 미래의 기약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한 그곳에 두근거리는 희망의 잔불을 지폈다는 것을.

광화문은 화해와 공론의 변론장
유혈 충돌은 600년 전통 깨는 것
헌재 판결을 조건 없이 승복하되
개헌 합의로 민주주의 살려내야

광화문은 600년 통치의 중심이었지만 피를 본 적은 단 두 차례 있었다. 아관파천 직후 군국기무처로 돌아가던 총리대신 김홍집이 친러군과 성민들에게 피살된 사건, 4·19 당시 경무대 발포로 학생들이 죽은 사건. 의금부와 포도청이 밀집했던 종각역 부근에서도 생명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죄인들은 절두산 모래밭에서 처형됐다. 19세기 중반 만인소 행렬이 머리를 조아린 곳도 광화문이었다. 요즘의 헌법 조항처럼, 군주는 반드시 비답(批答)을 내려야 했는데 그것을 받으면 평화롭게 돌아갔다. 광화문은 폭력이 아니라 화해, 혁명이 아니라 진취적 공론을 발효하는 국가적 변론장이었다.

지금, 광화문 광장을 메운 시민들은 그 역사적 지층 위에 어떤 발자국을 찍는가? 8년 전 박근혜 탄핵만 해도 주권 회수를 외치는 시민적 합의가 선명했다. 국정농단을 단죄한다는 절규는 이편저편을 가르지 않았다. 그렇게 추대된 문재인 정권이 적폐청산을 내세워 피아를 선명하게 갈라칠 줄이야 예상하지 못했다.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던 문 정권은 적대 정치의 끝판이었다. 광화문은 증오를 발효하는 두 편의 양조장이 됐다. 구호와 깃발이 달라진 양 진영에 정치인들이 합세해 으르렁대는 이 시국은 해방공간보다 더 불안하다. 광화문이 폭력과 유혈사태로 얼룩져도 절제와 화해로 수습할 정치인과 통치력은 사라졌다.

유혈 충돌이 두렵다. 피를 흘리면 파산한 민주주의가 회생할까. 적과 타협하라는 국민적 명령을 정당들은 새겨듣지 않았다. 파산의 주범은 두 가지다. 한국 정치는 대통령의 실패만을 노린다는 것. 실패하지 않으려는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의회는 탄핵을 남발한다는 것. 윤석열과 이재명의 ‘방탄 정치’와 정당의 극한 대립이 결국 비상계엄이란 참사를 초래했다. 이들이 행한 유일한 공헌은 ‘87년 헌법’으론 한국의 미래를 가꿀 수 없다는 사실의 확증이다.

광화문 광장의 열기가 양쪽으로 찢겨서는 안 되는 필연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는 정치인들에게서 주권을 회수해 새로운 정치판을 짜야 한다는 시민적 각성이 만인소나 전봉준의 상소보다 더 중차대한 역사적 요청이다. 비상계엄의 정당성을 주창하는 정권이나, ‘당신은 탄핵이야!’를 빈발하는 야당에 민주정치의 복원을 기대하기란 이미 불가능하다. 광장의 동원정치에 익숙한 이들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신뢰할까? 인용이든 기각이든 정치인들이 먼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울부짖거나 자해하는 시민들 뒤편에서 정의의 가면을 쓴 채 권력욕을 채울 그들, 대장을 졸졸 따르는 졸개들.

헌재의 판결이 정의로운가를 두고 격돌해서는 안 된다. 헌재 판사들은 나름의 독자적인 양심과 신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판결에 도달할 것으로 ‘믿어야 한다’. 어렵기는 하다. ‘정의론’의 권위자 존 롤즈(J. Rawls)가 그토록 강조한 ‘무지의 장막’이란 전제 조건이 이미 벗겨진 상태라서 그렇다. 대중적 신뢰를 획득하자면 판사들의 개인적 이력과 정보, 성향이 베일에 싸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만천하에 드러났고, 유튜브의 인기 소재로 널리 퍼져나갔다. 온갖 억측과 저항을 유발할 조건이 먼저 충족되었다. 헌법재판소를 철통 방어해도 극한 저항과 절규가 철조망을 뚫고 창문을 파손할 정도로 쟁쟁거릴 것이다. 그래도, 승복해야 한다. 유혈사태는 또 다른 비극을 부른다.

프레스센터에서 한림대 주최 심포지움이 열렸다. 파산한 민주주의를 살리려는 학문적 모색이었다. 평생 민주정치의 취약점을 탐구해온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절창한 것이 바로 ‘개헌’이었다. 38년간 단 한 차례도 수정하지 않은 ‘87헌법’은 이젠 고장 난 엔진이고, 누가 정권을 잡아도 독단과 이념정치의 올가미에 걸려들고야 말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정당정치의 관상동맥이 막혔다. 싸움 잘하는 ‘우두머리 정치’, 수틀리면 탄핵 경고장을 날리는 적대 정치가 팽배한 상황에서 특정인을 비난하고 옹호한들 무엇이 나아지겠는가.

부디 나라를 생각해 달라. 기각이면, 윤석열 대통령은 6개월 내 개헌과 즉시 하야를 약속하면 된다. 인용이라면, 대선 이전에 국민적 합의 기구를 만들어 개헌을 단행하거나, 대선 주자들에게 6개월 내 개헌을 요구해야 한다. 광화문의 역사적 지층 위에 유혈극이 없기를, 운집한 시민들이 개헌을 외치기를 희망한다. 무겁게 부르는 광화문 연가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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