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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의 한 홈플러스 매장 모습. 서울회생법원은 이날 홈플러스 매장 내 점포 임차인들에 대한 회생채권 조기 변제를 허가했다. 전민규 기자
1998년 설립된 영화엔지니어링은 국내 강구조물 시공능력 평가에서 6년 연속 1위에 오를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은 중견 기업이었다. 잠실 롯데월드타워,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신도림 디큐브시티 공사 등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2009년 사모펀드(PEF) MBK파트너스가 1000억원에 인수한 지 7년 만인 2016년, 영화엔지니어링은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대주주인 MBK가 기술력 강화나 기업체질 개선보단 무리한 해외 수주, 배당 확대를 통한 단기 실적에만 치중한 결과라는 평가다. 결국 법정관리 이듬해인 2017년 인수가의 절반인 500억원 수준으로 연합자산관리(유암코)에 다시 팔려나갔다.

지난 4일 국내 대형마트 2위 홈플러스가 기습적으로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하면서 국내 사모펀드 전반의 모럴 헤저드와 경영 역량 문제로 논란이 번지고 있다. 저평가된 기업을 인수해 체질 개선으로 기업가치를 올리기보다는, 현금과 유형자산이 충분한 기업을 인수한 뒤 단기간에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 급급해 ‘껍데기’만 남긴다는 지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근영 디자이너

17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홈플러스·영화엔지니어링과 같은 사례는 비단 MBK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샘은 2021년 사모펀드 IMM 프라이빗에쿼티(PE)에 인수된 직후 매출액과 영업이익 모두 급락했다. 특히 2022년 영업이익은 217억원 손실을 기록하면서 2002년 상장 이후 사상 처음으로 적자로 전환됐다. IMM PE는 한샘 인수 당시 주당 22만원대로 경영권을 사들였지만, 현재 4만원대로 내려앉았다. 2021년 말 2조1792억원이었던 시가총액은 지난해 말 1조1190억으로 반토막난 상태다.

일차적으로 업황 부진에 따른 영향이 컸다.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거래량이 급감하면서 한샘 주 사업인 인테리어 수요 자체가 줄어든 것이다. 실제 당시 LX하우시스, 신세계까사 등 동종업계 모두 부진을 면치 못했다. 문제는 이후 행보다. 한샘은 실적 악화 속에서도 2022년 132억원, 2023년 747억원, 지난해 1416억원 등 배당을 급격히 늘려왔다. 반면 신공장과 물류센터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부산 강서구 국제산업물류도시 부지는 매각했다. 일각에서 신사업 확장은 뒤로 한 채 대주주인 IMM PE의 손실 보전을 위해 고배당을 활용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MBK파트너스도 홈플러스 몸값의 절반 이상인 4조원을 빌려 인수해놓고, 이를 갚기 위해 알짜 점포들을 우선 매각했다. 그러면서도 이커머스 대응은 소극적이었다. 특히, 마트를 중심으로 중소업체와 소상공인이 줄줄이 연결된 유통 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점포 임대료와 금융 이자 상환을 유예하겠다는 목적으로 수천명 명의 현금 흐름을 막는 법정관리를 신청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신현한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온라인의 급격한 성장, 오프라인 유통업의 성장성 둔화를 고려하지 않고 (사모펀드가 이전에 해오던) 과도한 차입이나 부동산 매각‧임차보증금 유동화를 통한 단기적 현금 회수에 집중했다”며 “그 결과 홈플러스의 경쟁력은 더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밀폐용기 등 주방용품 업체로 유명했던 락앤락도 2017년 홍콩계 사모펀드인 어피니티에쿼티 파트너스에 인수된 이후 7년 만인 지난해 상장폐지됐다. 인수 당시 1조을 넘었던 시가총액은 매년 감소하더니 2023년 2691억원까지 쪼그라 들었다. 영업이익은 2023년부터 적자로 전환됐다. 경영 효율화를 명목으로 국내외 공장을 매각하는 한편, 고배당과 유상감자를 통해 투자금 회수에 치중한 결과다. 2019년 JKL파트너스에 인수된 롯데손해보험은 지난해 상시 매각 체제로 전환됐다.

이를 두고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모펀드의 근본적인 한계”(유정주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제도팀장)라는 지적이 나온다. 유 팀장은 “오너가 있는 기업이라면 사재를 출연해서라도 책임경영을 이어가겠지만, 사모펀드는 차입매수(LBO)을 위해 기업의 재무제표를 보기 좋게 다듬어서 되파는 게 목적”이라며 “경영에 집중하기보단 부채를 줄이고, 자산을 매각해 이익을 많이 남기는 데 치중하다 보니 기업 성장에 한계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국내 사모펀드 시장이 커지면서 이같은 사례는 언제든 재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높은 상속세 등에 부담을 느낀 중소·중견업체 오너들이 회사를 물려주는 대신 매물로 내놓는 사례가 늘어날수록 사모펀드 시장도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다”며 “투자가 100%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홈플러스와 같은 사례는 언제든 반복될 것”이라고 짚었다.

이에 모니터링 강화, 레버리지(차입) 비율 제한 등 사모펀드에 대한 금융당국 규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감독원도 운용자산 규모 상위 30개 대형 사모펀드에 대해 펀드 관련 내역을 요청하는 등 대대적인 점검에 나섰다. 한국재무관리학회는 지난 14일 ‘사모펀드 경영방식 문제점’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정부 가이드라인 마련을 통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다만 ‘규제 만능주의’로 빠져선 안 된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있다. 사모펀드가 위기에 처한 기업에 긴급 자금을 수혈하고, 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등 자본시장의 ‘메기’ 역할도 하는데, 지나친 규제는 이 순기능까지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 사모펀드와의 역차별 문제가 발생할 우려도 있다. 익명을 원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레버리지 한도를 정하는 자체가 굉장히 인위적이고, 매물 시장에서 관련 규제가 없는 해외 사모펀드가 훨씬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그러다 진짜 ‘국부 유출’이 일어나는 최악의 결과로 가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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