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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왼쪽 첫 번째)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오른쪽 첫 번째) 등이 만나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시작했다. 사진=AP연합뉴스

터널의 끝이 보인다. 2022년 2월 발발한 이래 사상자 100만 명을 넘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30일 일시 휴전에 돌입하며 사실상 종식을 앞둔 분위기다.

뒷맛은 개운치 않다. 전쟁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는 종전 협상의 주체가 아니다. 협상은 중동 최대 산유국이자 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진행되고 있다. 내심 ‘언더도그(underdog)’의 승리를 바라던 국제사회 여론은 ‘힘의 논리’라는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 같은 결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에 예견됐다. 이념과 상관없이 손익에 따라 적과 나를 구분하는 그의 사업가적 면모 때문이다.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트럼프 행정부 특성상 연간 평균 400억 달러(약 58조2000억원) 지원금이 투입되던 전쟁의 출구전략은 시급했을 것이다.

‘형님’이 “이제 사태를 끝내겠다”고 나선 가운데 각국은 전쟁의 참상을 뒤로하고 계산에 분주한 모습이다. 국제정치에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현실주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서방의 지원을 받고서도 패전이 확실시된 우크라이나는 청구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에 종전 뒤 들어갈 비용과 나눠야 할 파이를 두고 강대국 간 치열한 눈치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최후의 승자는 미국
2월 28일 광물협정을 위해 백악관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설전 중 다른 곳을 바라보는 모습. 사진=AFP연합뉴스

3월 11일(현지 시간)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사우디 제다에서 고위급 회담을 열고 러시아와 ‘30일 임시휴전’을 수용하겠다고 합의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광물협정도 곧 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협정 내용은 그동안의 군사 지원 대가로 양국은 우크라이나에 소재한 광물, 가스 등 천연자원 및 항만 시설의 수익금 50%를 미국이 100% 보유한 기금에 투입하는 것이다.

지난 2월 말 광물협정 체결을 위해 백악관을 방문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에서 충돌을 빚으며 양국 간 서명은 무산된 바 있다. 기금에 무려 5000억 달러를 채워야 하는데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에 대해 ‘1달러를 지원받아 2달러를 갚는 격’이라며 비판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군사지원 중단이라는 강수를 두면서 결국 우크라이나가 숙이는 모양새다.

우크라이나에는 희토류와 티타늄, 망간, 니켈 등 전략광물이 다수 매장돼 있는데 그 개발권을 미국이 독점하게 되는 셈이다. 특히 희토류는 첨단 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광물이지만 채취 과정에서 환경오염 등 문제로 중국의 생산량이 세계 1위였던 물질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와의 광물협정을 통해 70%에 달하던 희토류 공급에 대한 중국 의존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쟁 내내 세계시장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도 미국 방산 기업들이다. 스웨덴 비영리 싱크탱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0~2024년까지 5년간 세계에서 무기 수입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우크라이나로 미국산 무기가 45%로 가장 많았다. 이 기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무기수입량도 2배 늘었는데 그중 미국산 비율은 64%였다.

노스트스트림 가스관 공격으로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중단되면서 미국산 셰일오일 수요도 크게 늘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유가가 떨어지면서 위기를 맞았던 셰일오일 생산 업체들은 기사회생했다. 셰일오일 손익분기점은 배럴당 30~50달러 사이로 추정되는데, 전쟁 직후 서부텍사스유(WTI) 가격은 최고 122달러까지 치솟았다가 현재 65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미국 내 원유 생산량은 1349만1000배럴/일(bpd)로 역대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안보 위협에 급박해진 유럽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을 통해 미국이 얻은 가장 큰 수확으로 ‘유럽 길들이기’를 꼽고 있다. 유럽 국가들도 부지런히 무기 수출을 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강 건너 불구경’을 한 북미, 동아시아권 강국들과 달리 앞마당에서 발생한 전쟁에 높은 안보 위협을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나토에서 탈퇴할 수 있다”는 협박을 통해 유럽에 방위비 분담금 및 관세 확대를 강하게 압박할 수 있는 배경이다.

국제정치·러시아 전문가인 홍현익 세종연구소 명예 연구위원(전 국립외교원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유럽을 꼼짝 못 하도록 할 수 있게 됐다”며 “트럼프는 유럽 각국이 국방비를 증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유럽 정부는 이번 전쟁으로 인해 이미 국방비를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했던 러시아가 실전을 감행한 상태에서 미국의 안보 우산이 사라지는 ‘힘의 공백’ 상태는 수십 년간 평화를 지켜온 서유럽 국가에 크나큰 공포로 다가온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에 천문학적인 지원을 이어온 유럽은 3년을 넘긴 소모전에 지쳐가고 있었다. 러시아 가스 공급이 중단되면서 일반 시민들은 ‘난방비 폭탄’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유럽은 미국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는 한편 젤렌스키 대통령도 미·러의 종전 조건을 따르도록 압박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집행위원장은 3월 5일 회원국에 국방 강화를 목적으로 한 1500억 유로 규모의 공동차입을 제안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 간 입장이 갈리자 다급해진 EU가 먼저 나섰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GDP의 2.1% 수준인 국방비를 5%까지 증액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최근 종전협상에 전향적 자세를 취하게 된 배경에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강대국들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최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측근이자 협상 전문가인 조너선 파월 국가안보보좌관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보내 미국의 요구사항에 반응할 것을 조언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바 있다.
‘살 주고 뼈 취한’ 러시아
2024년 6월 북한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찬하는 모습.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반면 이번 전쟁을 감행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결국 승전국으로서 ‘체면 차리기’에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5월 9일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을 종전의 ‘디데이’로 보기도 한다.

러시아는 지난해 말 기준 60만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며 지난해 8월에는 본토인 쿠르스크 지역을 점령당하기도 했다. 막대한 경제손실도 입었다. 전쟁을 시작한 첫해인 2022년 러시아 정부는 재정적자 3조3000억 루블(약 59조원)을 기록했다. 전쟁 지출이 막대한 데다 석유·가스를 헐값이 넘기면서 수입이 감소한 탓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2022년 돈바스(도네츠크·루간스크) 등 차례로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현재 점령지역은 우크라이나 전체 면적의 20%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소련 시절부터 친(親)러시아 주민들이 많은 산업·자원 중심지로 마리우폴 등 해안 도시에 러시아가 그토록 바라던 부동항이 위치한다. 이들 도시는 크림반도와 달리 육로로 본토와 연결된다.

무엇보다 ‘나토의 동진’이라는 앓던 이가 뽑히게 됐다. 소련 해체 이후 국력이 쇠락한 러시아는 동독에서 철수한 이래 1990년대 내내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국가의 나토 가입을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 자국과 인접한 우크라이나에서 2013년 11월 ‘유로마이단 혁명’이 발생하면서 친러시아 성향이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실각하자 크림반도를 병합하는 등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도 젤렌스키 대통령이 나토에 가입을 요청하면서 벌어졌다. 푸틴 대통령은 올초 트럼프 대통령에게 종전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를 요구했다고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정치 ‘카오스
알짜 영토와 광물 채굴권까지 뺏긴 상태에서 농업국가로 전락하게 된 우크라이나의 앞날은 어둡다. 나토 가입은 물론 미군 주둔도 현실화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안보 불안도 여전할 전망이다. 지금까지 전쟁을 명분으로 계엄을 15차례나 연장하며 임기를 끌어온 젤렌스키 대통령의 실각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미국과 러시아는 젤렌스키에 대해 ‘불법 대통령’이라며 폄하하고 있다.

법무법인 율촌 조은진 러시아 변호사(우크라이나 재건산업 법률자문팀)는 “현재 우크라이나 계엄령에 따른 젤렌스키 대통령의 임기는 5월 9일까지로 더 이상의 임기 연장 없이 대통령 선거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며 “전쟁 중 진행된 전자투표에 따르면 발레리 잘루즈니 전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이 67% 넘는 득표율을 기록해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은 개전 초기 탁월한 군 장악력과 기동방어 전략을 통해 불리한 전세 속에서도 러시아 점령지역을 일부 탈환하는 등 선전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총사령관에서 경질된 채 영국 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워싱턴포스트(WP)는 잘루즈니 장군이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이 실패할 것을 예상해 서방 국가들과 휴전 논의를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경질 당시 전쟁을 지속하고자 한 젤렌스키 대통령이 ‘경쟁자 축출’ 의도로 그를 영국에 보냈다는 주장이 나왔다.

누가 지도자가 되든 종전 후 우크라이나 정치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전쟁 책임론’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전망이다. 우크라이나는 2019년 국제투명성기구(TI)가 조사한 부패인식지수에서 180개국 중 126위를 차지할 정도로 전쟁 전부터 부패한 나라였다. 나토 가입의 선결조건인 공공부패 척결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애초에 나토 가입 또한 어려운 상황에서 젤렌스키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나라를 전쟁으로 끌어들였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젤렌스키 대통령과 측근들이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에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동아시아 정세 여파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주로 이번 전쟁을 관망하며 개입하지 않는 입장을 취했다. 친서방인 한국, 일본은 우크라이나에 지원금을 보냈을 뿐 살상무기 지원은 하지 않았다. 중국 역시 2022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기권했을 뿐 사태를 관망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친서방 국가들이 나간 자리를 대신하며 러시아 자동차, 가전 시장을 차지했다. 수출길이 막힌 러시아 가스도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북한은 달랐다. 이미 불량국가로 국제사회에서 낙인찍힌 북한은 국제사회 눈치를 볼 필요없이 전쟁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북한은 총 4개 여단, 1만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민군을 파병하기로 했으며 포탄 490만 발을 제공했다. 1차 파병된 북한군은 대부분 우크라이나가 차지했던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 탈환에 투입됐다. 이로 인해 확보할 연간 수입은 3.2억~13.4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최대 수혜 국가는 북한이 될 전망이다. 러시아와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됐음은 물론 군사지원에 대한 대가도 누리고 있다. 지난해 6월 푸틴 대통령 방북 당시 러시아와 맺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에 따라 북한에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도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 경제적 협력도 기대되는 상황이다. 한국 위성사진 업체 SI애널리틱스가 지난 3월 3일 촬영한 위성사진에는 북·러 간 육로를 연결하는 두만강 자동차 교량 건설 사업이 진행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한국의 적국이 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홍현익 위원은 “러시아는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보고 있으며 과거부터 한국과 협력해 극동지역을 개발하고자 했지만 북한이 호전적인 태도를 보여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과 가까워진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대화를 주선하는 등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처럼 동아시아 정세가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한국의 리더십 공백 상태는 아쉬운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종전협상에 대해 견제하고 나섰다. 미국과 사이가 벌어지고 있는 유럽과 스킨십도 강화하고 있다. 왕이 외교부장은 3월 7일 기자회견에서 “한 국가의 안보는 다른 국가의 불안 위에 세워져선 안 된다”며 “공동·종합·협력·지속가능의 신(新)안보관을 실천해야 유라시아 대륙과 세계의 항구적 안정을 진정 실현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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