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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인력시장]
한국 근로자들부터 설자리 잃어
가정내 작은 공사들도 씨가 말라
임금 낮아도 일감 찾는 근로자들
물류·인테리어 등 전환도 늘어나
중첩된 하도급 구조가 위기 키워
14일 새벽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인근 인력시장에서 일용직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북적이고 있다. 이날 근로자들은 꼬박 세 시간을 추위에 떨며 기다렸지만 대다수는 일감을 찾지 못한 채 귀가해야 했다. 성형주 기자

[서울경제]

이달 14일 서울 남구로역 앞. 새벽 4시부터 건설 현장 일자리를 구하려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좁은 길가를 가득 채웠다. 전국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구로 인력 시장’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인 일용직 근로자들을 각지 현장으로 태우고 갈 승합차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거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거리는 근로자들이 내뿜은 매캐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아무리 기다려도 일감이 없자 이들이 안전화를 신은 채 길 한복판에서 장기판을 벌이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50대 일용직 근로자 김 모 씨는 “운 좋으면 일을 건진다는 생각으로 나와 커피 한 잔에 담배만 태우다 집으로 돌아갈 뿐 기다린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날 대다수가 꼬박 세 시간을 추위에 떨다 귀가했다. 60대 일용직 근로자 백 모 씨는 “1주일 내내 나왔지만 저번 주 하루만 일감을 찾는 데 성공했다”며 “체감상 IMF 외환위기 때만큼 경기가 나쁜 것 같다”고 했다.



건설업 불황의 한파가 인력 피라미드의 최하단에서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16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유료 직업소개소(인력 사무소) 폐업은 1764건으로 집계돼 관련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991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폐업 건수는 2019년 이후부터 2023년까지 줄곧 1600건 선에서 형성되다 지난해 건설 업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급증했다. 서울 은평구의 한 인력사무소 사장은 “50년째 근로자들을 실어 건설 현장으로 보내고 있지만 지금이 제일 힘들다”면서 “지난 1년 새 매출이 90% 줄어들어 자릿세도 못 낼 정도”라고 전했다.

서울 남구로역 인근에서 일감을 구하려는 일용직 구직자들이 대기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구로인력시장에서는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인과 한국인 근로자들이 나뉘어 구역이 형성됐다. 그러나 숫자도 중국인 근로자들이 수배 이상 많았을 뿐더러 드물게 오는 건설 현장 승합차도 이들만 실어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50대 일용직 근로자 최 모 씨는 “보통 보도블록 일당이 25만 원인데 중국인들은 그 반값에도 구할 수 있다”면서 “일감을 구해 승합차를 타는 사람들 대부분이 한족이나 조선족 잡역부”라고 전했다.

인력 사무소들은 말이 잘 통하지도 않는 중국인들부터 데려갈 만큼 단돈 1만 원이라도 일당을 낮춰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한다. 건설 원청 업체가 수주한 일감 자체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경쟁이 과열된 탓이다. 한 인력 사무소 사장은 “아침에 출근한 일용직들 중 한 명도 현장에 못 보내는 경우도 많다”면서 “다른 곳 사정도 다 비슷할 것”이라고 했다. 대형 건설 작업뿐만 아니라 가정 내 수리를 포함한 작은 공사들도 씨가 말랐다. 또 다른 인력 사무소 사장은 “하루에 일자리 달라는 전화는 열 통이 넘는데 새로운 건설 현장에서 일감을 준다는 연락은 한 건 올까 말까 한다”고 토로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른 일을 찾거나 부업을 하는 사례도 부쩍 늘었다. 일용직들 사이에서는 물류나 인테리어·생산 작업이 건설 현장의 대안으로 꼽힌다. 60대 일용직 근로자 이 모 씨는 “건설 쪽 일감이 워낙 안 들어오다 보니 금액이 적더라도 일단 일은 할 수 있는 물류나 생산 부문으로 빠지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 밖에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는 경우도 많지만 연령대가 높은 경우 새로운 직장을 찾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강원 강릉시 안목해변에서 굴착기가 폭우와 너울성 파도로 쓰레기가 쌓인 해변을 청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각종 기계를 운용할 기술을 보유해 건설 현장에서 ‘귀족 신분’으로 통했던 중장비 기사들마저 생활고를 호소하고 있다. 가뜩이나 일감이 줄어든 마당에 건설 업계 거래 관행상 대금을 길게는 수 개월 이상 늦게 지급받는 경우가 많아서다. 전직 영업용 지게차 기사 A 씨는 “한 회사에서만 다섯 달치 금액을 밀렸다”면서 “일만 해주고 돈도 못 받는 건설 일을 이제는 그만뒀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고공 작업용 ‘스카이차’를 운용하는 B 씨는 “열 번 작업하면 한 건 정도는 미수금 문제가 터진다”며 “말로는 준다니까 다들 기다려보지만 하청 업체가 고의적으로 떼어먹을 때는 결국 포기하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건설 현장에서 작업자들이 자재를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불황의 여파는 건설업 특유의 하도급 구조 탓에 더욱 확산됐다고 보는 분석이 많다. 건설산업기본법은 하청 업체가 하도급 받은 공사를 다시 맡길 수 없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발주자의 서면 승낙을 받아 예외적으로 재하도급하거나 심지어는 편법으로 다단계 구조를 갖추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50대 일용직 근로자 최 모 씨는 “업체가 아닌 개인이 봉고차를 끌고 나와 인부들을 태우고 다니며 수수료를 떼먹는 경우도 있다”면서 “인력시장 상황을 잘 모르거나 한국말이 서툰 중국인들을 값싸게 부리고 차익을 보는 식”이라고 했다.

이렇게 원하청이 중첩된 구조 아래에서는 건설 업계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일감은 씨가 마르고 임금 체납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돈이 흐르다 고리 하나만 끊어져도 관련 업체들이 연쇄적으로 문을 닫기 때문이다. 중간 하청 업체들이 망해버려 돈이 묶이면 인력 사무소나 중장비 기사들은 속수무책이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형식적인 현행 규정 대신 하도급 구조를 3단계 이상 두지 못하도록 보다 실효성 있는 정책 수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권대중 서강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당장은 건설사 폐업과 그로 인한 실업이 심각하지만 경기 호전 시에도 주택 공급을 늘릴 수 있는 체력이 줄어드는 점이 더 큰 문제”라며 “소비금융뿐만 아니라 건설사 자금 압박을 풀어줄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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