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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규의 무대뒷담
‘클래식 표절’ 논란의 노래들
가수 민해경은 1981년 2집 앨범에 수록한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가 크게 히트하면서 그해 연말 10대 가수에도 선정됐지만, 이후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1981년 발표된 노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박건호 작사, 이범희 작곡)는 원래 ‘사랑에 빠진 여인’이란 제목으로 가수 정미조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노래를 신인 가수 민해경이 부르게 됐다. 당시 19살이던 민해경 나이에 맞춰 제목도 ‘여인’에서 ‘소녀’로 고쳤다. 노래는 크게 히트했고, 민해경은 그해 연말 10대 가수에도 선정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표절 시비가 제기됐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1, 4악장 일부를 발췌했다는 논란이었다. 4악장 도입부는 이 노래 첫 부분 “그대를 만날 때면~”과 너무도 흡사하다. 작곡가는 당시 “두 소절을 인용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고의가 아니라 표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여전히 이 교향곡을 ‘민해경 교향곡’이라고 부른다. 이 교향곡을 연주하는 공연장에 가면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관객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치와 덕목은 시대의 산물이자,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다. 중세 유럽에서 통용되던 덕목이 지금도 존중받을 리 만무하다. 대중음악, 클래식 음악을 불문하고 왕왕 빚어지는 표절 논란도 마찬가지다. 바흐와 헨델, 모차르트 시절엔 다른 작곡가의 일부를 차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모방은 때로 ‘돌을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로 여겨졌고, 위대한 모방은 진정한 창작에 버금가는 일로 간주했다. 지금의 예술은 개성과 독창성을 강조하며 타인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표절을 부도덕한 일로 치부한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선율이 아름다운 곡이다. 미국 팝 가수 존 덴버(1943~1997)도 이 곡의 일부를 차용했다. 그가 작사, 작곡한 ‘애니스 송’(Annie’s song)이다. 2악장 도입부에서 호른이 연주하는 아스라한 선율은 존 덴버의 대표곡인 이 유명한 노래의 첫 부분과 똑같다.

그룹 ‘시나위’의 리더인 신대철이 ‘가황’ 나훈아를 표절로 저격한 적이 있다. 나훈아가 작사·작곡했다는 2020년 발표곡 ‘테스형!’이 심수봉이 부른 ‘백만송이 장미’를 베꼈다는 비판이었다. “신청곡 한 곡 부탁드립니다. 다음번에는 ‘백만송이 장미’도 불러주세요. 테스형과 같이 부르시면 딱입니다. 따로 연습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같은 곡이니까요.” 신대철이 2021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이 곡의 원작자는 클래식을 전공한 라트비아 태생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라이몬츠 파울스(89)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 주제가 ‘오버 더 레인보’의 표절 시비를 다룬 미국 연예 미디어 ‘할리우드 리포터’ 기사. 할리우드 리포터 갈무리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 주제가 ‘오버 더 레인보’는 영화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이자, 가장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한 노래로 꼽힌다. 이 곡마저 표절이라고 하면 놀라 자빠질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시 17살 주연 배우 주디 갈런드가 불러 아카데미 주제가상까지 받았다. 이 곡을 둘러싼 신성한 아우라 때문에 표절 시비는 ‘모나리자를 더럽히는 것과 유사한 신성모독’(할리우드 리포터)으로 간주할 정도다. 하지만 노르웨이 여성 작곡가 싱네 룬(1868~1950)의 ‘연습곡 38’(Concert Étude, Opus 38)을 들어보면 영락없는 표절이다. 이 곡은 ‘오즈의 마법사’가 제작되기 훨씬 전인 1910년에 악보가 만들어졌다. 최근에야 표절 시비가 불거졌는데, 그 이유는 작곡가가 나치에 연루되면서 잊혔기 때문이다.

‘표절은 영감 없이 베끼는 것이고, 영감은 잡히지 않는 표절이다’란 얘기가 있다. 의도적인 표절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표절하는 경우도 있다. ‘눈’, ‘첫사랑’, ‘내 영혼 바람 되어’를 만든 작곡가 김효근은 “영감을 우뇌로 받아서 표절이나 짝퉁 여부를 좌뇌로 점검한다”며 “이리저리 뒤져보면 과거에 이 멜로디로 쓴 곡이 있는지 없는지 바로 답이 나온다”고 말했다. 요즘엔 유사한 멜로디를 걸러내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표절 감지 시스템도 있다. 창작자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점검한다면 표절을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창작 활동이 이어지는 한 표절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1997년까지 유지된 ‘공연윤리위원회 표절심의위’ 표절 판단 기준은 ‘2소절(8마디) 이상 주요 동기가 동일하거나 흡사한 경우’였다. 이후 표절심의위는 폐지됐고, 현재 표절 여부는 법원이 판단한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차용한 존 덴버의 ‘애니스 송’이 담긴 앨범 커버.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했다고 알려진 말인데, 스티브 잡스도 즐겨 인용한 어구다. 훔쳤다는 얘기는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아류나 복사본이 아니라 새로운 원본성을 획득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말은 “어설픈 시인은 흉내 내고, 노련한 시인은 훔친다”고 했던 시인 티에스(T.S) 엘리엇의 말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얘기 역시 오스카 와일드가 했다는 “재능 있는 사람은 빌리고, 천재는 훔친다”란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개인의 영감이라는 것도 결국 역사, 사회적으로 축적된 지식과 아이디어의 바탕 위에서 피어오른다. 딱 잘라 표절이라고 판정하는 게 그리 쉬운 얘기는 아니다. 사실, 가장 쉬운 해결책이 있다. 작곡가 스스로 ‘인용’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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