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 집권 이후 코인 산업이 미국에서 새롭게 각광받는 가운데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이 미 의회에서 잇따라 발의되고 있습니다. 공화당 주도로 상원에서 발의된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이 가장 대표적이며 하원에서는 ‘스테이블 법안(STABLE Act)’과 민주당 금융서비스위원회 맥신 워터스 의원의 법안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코인의 일종이지만 가치가 미국 달러, 한국 원, 일본 엔과 같은 법정화폐에 고정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현재 코인 시장에서는 법정화폐로 코인을 구매할 수도 있지만 비트코인을 지불하고 이더리움을 구매하는 것처럼 코인 간 거래도 가능합니다. 이 경우 두 코인의 가격 변동에 따라 일종의 ‘환율’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에 고정되므로 법정화폐 환산 가격과 동일합니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 가격이 1억원이라면 원화에 고정된 스테이블코인으로는 1억 개가 되는 것입니다. 달러 도미넌스가 더욱 강해진다스테이블코인의 가장 큰 장점은 법정화폐와 동일한 액수로 송금, 저축, 지불 등을 할 수 있다는 편리함입니다. 다른 코인은 법정화폐 가격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결제 수단으로 불안정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적어도 법정화폐 기준으로는 가치 변동이 없습니다. 100달러의 스테이블코인을 송금했다면 수신자는 정확히 100달러 가치를 받게 됩니다.
현재 가장 많이 쓰이는 스테이블코인은 테더(Tether)사에서 발행하는 USDT입니다. 테더가 100USDT를 발행하려면 이론적으로 100달러의 준비금을 보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100USDT 보유자가 현금 교환을 요청했을 때 이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테더는 과거 이 준비금 문제로 논란이 제기된 적이 있었지만 서클(Circle)이 발행하는 USDC와 함께 여전히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회사는 발행 및 거래에 따른 수수료, 준비금의 운용 수익 및 이자 등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미 의회에서 나온 법안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스테이블코인 기업들의 건전한 성장을 촉진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적정한 규제 속에서 육성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법안들은 공통적으로 발행량과 동일한 양의 준비금 유지를 의무화하고 월별 보고와 감사 의무, 자금세탁방지 및 테러자금조달방지 규정 적용을 요구하면서도 민간 발행을 허용해 경쟁을 촉진하는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주목할 점은 달러의 본고장인 미국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달러패권을 확장하려는 전략적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의 99.86%가 달러 기반으로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은 자연스럽게 달러 도미넌스를 강화시켜주는 도구가 됩니다. 이는 미국의 글로벌 금융 패권을 디지털 시대에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블록체인·코인 업계 이익단체인 디지털체임버(Digital Chamber)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에도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현 SEC 위원장 지명자인 폴 앳킨스가 고문으로 활동했던 이 단체의 보고서는 스테이블코인이 달러패권을 확장하는 효과를 상세히 분석하고 브릭스(BRICS)를 중심으로 한 ‘탈달러’ 움직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대응으로서 의미를 짚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발행 권한을 줄 것인가법안들 사이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비금융 대기업의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용 여부입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미국에서 확립된 금산분리 원칙에 따르면 이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코인 산업을 금융업의 범주에서 다룰 때 얘기입니다. 하지만 GENIUS 법안은 규제기관을 차등화하여 이를 일부 허용하는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민간 대기업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봅시다. ‘발광신발’이라는 운동화 브랜드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고객이 발광신발 매장에서 신발을 구매할 때 점원이 “고객님, 발광달러로 결제하시면 3% 추가 할인됩니다”라고 제안한다면 고객 입장에서는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으니 수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발광신발의 생태계에서 사용되는 ‘발광달러’라는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히 신발 구매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발광신발이 구축하는 경제 생태계 내에서 자재 대금 결제, 임금 지급, 로열티 포인트 운영까지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업은 은행, 카드사, 결제 기업 등 외부 시스템 이용에 따른 각종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글로벌 기업이라면 국제 거래에서 발생하는 금융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비용을 줄인 혜택은 기업과 고객에게 돌아갈 것이고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위해 예치한 준비금은 유보금의 효율적 운용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 이러한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스테이블코인 간의 ‘환전’, 즉 호환성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발광달러를 경쟁사인 ‘뽀대슈즈’ 제품 구매에도 사용하려면 발광달러가 뽀대슈즈를 자사 네트워크로 끌어들이거나 낮은 수수료로 발광달러→법정통화→뽀대달러 간 환전을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각 기업의 자체 스테이블코인이 더 많은 예치금을 유치하기 위해 이자율 등을 놓고 경쟁하게 되면 은행의 독점적 금융업 모델도 위협받게 됩니다. 어차피 모두 달러 기반이므로 달러의 영향력은 여전히 확장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기존 금융 시스템이 재편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금산분리 붕괴와 빅테크 독점의 우려미국 의회 일각, 특히 민주당 측에서는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하는 접근이 금융 리스크의 전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특히 빅테크 기업들이 광범위한 사용자 기반을 바탕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고 자체 금융 시스템을 구축할 경우를 경계합니다. “이러한 기업들이 이미 수억 명의 고객을 보유하고 있을 때 스테이블코인 분야로의 진출은 전통적인 규제 범위 밖에서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 주체를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우려와 “이미 데이터와 통신을 지배하고 있는 테크 대기업들의 경제적 권력 집중이 통화 기능으로까지 확장될 경우 독특한 리스크를 초래한다”는 경고가 대표적입니다.
미국이 스테이블코인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어떤 접근을 취해야 할까요?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논의가 일부 있지만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지배적인 현실에서 단순히 환율만 적용하면 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됩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스테이블코인 도입 시 기존 결제 시스템의 부대 절차와 비용이 크게 절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역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기존 금융 사업자들의 반발이 예상된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새로운 금융 패러다임을 둘러싼 한 판의 싸움이 예고되어 있는 셈입니다.
김외현 비인크립토 한국·일본 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