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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가뭄, 주목받는 ‘블루칼라’ 직종
지난 12일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한 구직자가 채용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가족을 부양하려면 평생 일은 해야 하니 기술 하나는 가져야겠다 싶었죠.”

지난 10일 서울 광진구의 한 기술학원. 도배지와 씨름하던 전업주부 이시현(41)씨가 잠시 허리를 편 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국가기능사 실기시험을 닷새 앞두고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이날도 학원에 나와 칼과 롤러를 잡은 그였다. 6살과 4살 두 아이의 엄마인 이씨는 도배 기능사 자격을 취득해 올해 안에 ‘블루칼라’ 직종에서 일자리를 얻는 게 목표다. 이씨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회사를 그만둔 뒤 오래 쉬다 보니 사무직 경력으론 재취업할 곳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더라”며 “기술을 배워두면 은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고심 끝에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튿날인 지난 11일 저녁 서울 동대문구 타일 기술학원에서도 수강생 윤모(38)씨가 오는 15일로 예정된 타일 기능사 시험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난해까지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장님이었던 윤씨는 계속된 영업 부진과 경기 불황에 결국 가게를 접고 타일공으로 직업 전환을 모색 중이다. 윤씨는 “자영업을 하던 사람이 가게를 접으면 막상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며 “손님이 없으면 음식 재료도 다 버려야 하는 요식업보다는 기술로 먹고사는 기능직 업종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좀 더 낫겠다 싶어 타일 기능사 학원에 다니게 됐다”고 전했다.

가중되는 실업난에 일자리 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블루칼라 기능직 직종에 도전하는 구직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기능직 자격증을 따려는 국가기술자격시험 접수자는 지난해에만 238만 명에 달했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관계자는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기능사 자격을 취득해 블루칼라 직종에 도전하려는 구직자가 늘곤 한다”고 설명했다.

청년층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 블루칼라 직업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게 눈에 띈다. 실제로 중앙일보가 지난 1월 오픈서베이에 의뢰해 2030세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3.4%가 블루칼라 직종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반면 “부정적”이란 답변은 2.2%에 그쳤다.

지난 12일 서울 구로구의 한 간호학원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전모(30)씨도 블루칼라 직종을 찾는 구직자 중 한 명이었다. 전씨는 대학 졸업 후 기업 채용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신 뒤 진로를 바꿔 간호조무사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고 나섰다. 전씨는 “기업들이 대부분 경력이 있는 지원자를 선호하다 보니 첫 직장을 구하지 못한 취준생은 경력 쌓을 곳을 찾기가 갈수록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며 “간호조무사 자격을 취득하면 실습했던 병원에 취업할 확률이 훨씬 높아질 것 같아 진로를 바꿨다”고 말했다.

고용시장에 부는 찬바람도 블루칼라 직종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취업 정보 플랫폼인 ‘고용24’에 따르면 지난달 구직자 1인당 일자리 수는 0.40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2월 이후 동월 기준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 1월엔 0.28로 1999년 외환위기 때 수준(0.23)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한상근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구직자들이 과거에 비해 블루칼라 노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면서도 “다만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차선책으로 여기는 시선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최근엔 경기 불황에 따른 폐업 후 생계 수단으로 도배나 타일, 도장 기능사 자격에 눈길을 돌리는 자영업자들도 크게 늘고 있다. 통계청 조사 결과 지난 1월 자영업자는 550만 명으로 코로나19 사태로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2020년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이 같은 추세는 올해도 계속될 전망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달 자영업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순이익이 감소했다’고 응답한 자영업자는 72%에 달했다. 자영업자 김모(53)씨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족이나 친척, 지인 중 기능직 경력자에게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우려는 자영업자들도 부쩍 늘고 있다”고 전했다.

문제는 코로나19 이후 블루칼라 직종에 도전하는 구직자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반면 수요는 여전히 제한적인 상황에서 기능직 시장도 포화 상태에 다다랐고 이에 따라 일자리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광진구에서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는 홍준석(52)씨는 “코로나19가 확산될 때만 해도 일손이 부족했는데 이후 기술 자격증 취득자가 쏟아져 나오면서 지금은 자격증이 있어도 일감을 바로 얻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블루칼라 일자리에 대한 정부의 제도적 지원에 더해 사회적 인식 제고가 함께 모색돼야 할 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예전에 비해선 블루칼라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 하더라도 여전히 직업 간 지위 격차가 크다는 지적도 곁들여진다. 한상근 연구위원은 “직업의 사회적 지위를 비교 분석한 결과를 봐도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일본 등 주요 경제국 중 직업 간 격차가 여전히 가장 크게 벌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화이트칼라 일자리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도 더 늦기 전에 양질의 블루칼라 일자리 확보를 위한 제도적 개선과 지원에 나서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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