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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국외소재 문화유산 보전처리 특별전 언론공개회에서 보존처리를 마친 '활옷'이 공개됐다. 뒤쪽에 보이는 건 8폭 병풍 '평안감사 도과급제자 환영도'. 연합뉴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가장 진한 붉은색인 대홍(大紅)의 염색은 왕실에만 허락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옷이 홍장삼(紅長衫), 다른 이름으로 활옷이다. 공주·옹주·군부인(왕자의 부인) 등 왕실 여성들이 일생에 한번 있는 혼례날, 겹겹의 예복 맨 바깥에 걸쳤다. 이 화려한 아름다움이 구한말 이 땅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사로잡았다. 현재 국내외 전해지는 50여점 가운데 20여점이 해외에 소장돼 있다.

이 가운데 하나인 미국 피바디에섹스박물관(PEM) 소장 활옷이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공개되고 있다. 18~19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활옷은 1927년 당시 유명한 골동상이던 야마나카상회가 PEM에 기증했다. 여러 차례 사용으로 낡고 바랜 데다 그 후로도 약 100년이 흘러 애초의 자태를 잃은 상태였다. 이를 최근 국내기술로 보존처리해 제 모습을 살려냈다.

“활옷은 처음엔 왕실 혼례복이었지만 19세기 말부턴 사대부가와 평민들도 혼례날 입을 수 있었어요. 워낙 귀한 재료에다 만드는 데 공이 들어서 한 벌 만들면 두고두고 돌려가며 입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이 이 옷 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활옷 보존처리를 담당한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의 채정민 학예연구관의 말이다. 채 연구관은 지난 11일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제4회 국외소재 한국문화유산 보존·복원 국제심포지엄에서 관련 발표를 했다. 이어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좀 더 자세히 보존처리 뒷얘기를 들려줬다.

미국 피바디에섹스박물관 소장품인 조선 활옷이 보존처리 되기 전 앞모습. 오염과 탈색, 옷감 마모 등이 뚜렷했다.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미국 피바디에섹스박물관 소장품인 조선 활옷이 보존처리 되기 전 뒷모습. 오염과 탈색, 옷감 마모 등이 뚜렷했다.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PEM 활옷의 보존처리 전 모습이다. 모란·연꽃·백로·봉황 등 화려한 문양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탈색되고 꼬질꼬질한 상태다. 목덜미의 옷깃(동정)과 소매 부분도 땟자국 일색이다. 옷깃이나 소매의 흰 천은 새 신부가 입을 때마다 교체했을 거다. 하지만 전체적인 옷감에 얼룩이 들거나 해져서 자수 문양이 탈락했다면? 조선시대엔 드라이클리닝도 없었고, 이런 고급 재료는 우물가에서 손세탁하는 무명옷에 비길 바가 아니다. 어떻게 빨래하고 수선했을까.

“비단 한복과 마찬가지로 활옷 역시 빨아입을 순 없었어요. 만약에 오염 때문에 꼭 세척해야 했다면 아예 봉제를 뜯어서 옷감 중에 세척할 건 하고 아닌 건 새로 해 넣었죠. 한번도 뜯지 않은 건 ‘진솔’이라고 옷고름 같은 데 실꼬리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게 없는 건 해체해서 수선했단 뜻이죠. 웬만한 활옷은 모두 수선자국이 있는데 이번 PEM 활옷은 특히나 여러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만큼 잘 만들어서 두고두고 대를 물려가며 입었단 뜻이죠.”

조선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6남이었던 이곤(1919~1984)의 혼례사진. 사진 나무위키 캡처(의친왕기념사업회 제공)
이를테면 자수가 꼼꼼히 수놓인 부분은 시간이 갈수록 바탕 직물이 무게감을 못 버티고 헐거워진다. 혼례 때 일그러진 예복을 입고 싶은 신부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다른 직물에 있는 자수를 통째로 오려 마모된 직물 부위와 교체해 넣은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채 연구관은 “꽃잎이나 나뭇잎 문양을 그렇게 오려서 갖다 붙였는데, 전혀 티가 안 나고 원래 자수인 양 어우러지게 한, 아주 놀라운 보수 솜씨였다”고 감탄했다.

지난해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복온공주(1818~1832)의 홍장삼의 자수. 복온공주는 조선 순조(재위 1800~1834)와 순원왕후 김씨의 둘째 딸이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유물을 보존처리할 땐 원래 상태부터 해체 수순, 보수하고 복원하는 과정 전체가 중요한 실마리이자 연구 대상이다. 이번 PEM 활옷에선 옷감 구석에서 실오라기만한 지푸라기가 발견됐다. “당시엔 마당에 화문석을 깔고 혼례를 했을 텐데, 아마도 신부가 절하느라 앉았다 일어나며 묻은 지푸라기 같다. 털어냈음에도 한가닥이 달라붙어 100여년 후에 우리의 상상을 돕는다”고 채 연구관이 말했다.

미국 피바디에섹스박물관 소장품으로 이번에 국내에서 보존처리한 조선 활옷 소매에서 김포 지역 노비의 추수기(추수 경작에 관한 기록)가 나왔다.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조선 활옷 보존처리 중에 소매에서 발견된 김포 지역 노비의 추수기(추수 경작에 관한 기록).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이 활옷은 언제 누구를 위해 제작됐을까. 오롯이 밝혀내진 못해도 어떤 이들을 거쳐갔는지 짐작케 하는 단서는 있다. 반듯한 형태가 중요한 활옷은 옷감 안에 한지로 심지를 대 모양을 잡는다. 예전엔 종이도 귀했기 때문에 이미 사용한 종이를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보존처리 과정에서 소매에 부착된 여러 겹의 한지를 해체하니 그 중 하나가 추수기(秋收記)로 확인됐다. 추수기란 경작지의 추수에 대해 기록한 문서다. 내용 중에 ‘金浦古縣內郡內兩面奴甲福秋收記 戊寅九月 日’가 있어 김포 지역 노비 갑복(甲福)이 기록한 추수기로 보인다. 여기 나온 무인년은 활옷 제작시기를 감안할 때 1818년, 1878년, 1938년 중 하나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 활옷의 보존처리 중에 소매를 분리한 길의 겉안감 사이에선 낙복지(과거에서 떨어진 사람의 답안지)가 나왔다.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소매를 분리한 길의 겉안감 사이에서도 여러 겹의 한지가 나왔다. 그 중 일부는 낙복지(落幅紙)라고 한다. 낙복지란 과거시험에 떨어진 사람의 답안지로, 역시나 종이가 귀한 탓에 이렇게 옷의 심지로 재활용된 것이다. 누구의 답안지였는지 아직까진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약 13개월간의 보존처리를 거쳐 PEM 활옷이 재탄생한 모습이다. 지금이라도 인생 최고로 어여쁜 날, 신부에게 입혀 줄 수 있을만큼 색상과 자태가 선명해졌다.

미국 피바디에섹스박물관 소장품으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을 통해 보존처리한 조선 활옷의 앞모습.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미국 피바디에섹스박물관 소장품으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을 통해 보존처리한 조선 활옷의 뒷모습.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이번 보존처리는 해외에 있는 한국 문화유산의 조사·연구·환수·보존을 지원하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PEM의 요청에 따라 석주선기념박물관 측에 의뢰하면서 이뤄졌다. 정확한 비용을 밝힐 순 없지만, 만약 이 같은 활옷을 오늘날 제작한다면 자수 놓는 비용만 7000만~8000만원을 헤아린다고 한다. 여기에 비단 및 금사 같은 재료와 침선(바느질) 비용까지 더하면 1억원을 훌쩍 넘는다.

참고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라크마) 소장 활옷이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의 지원 하에 국내에서 보존처리된 바 있는데, 당시 이 비용은 방탄소년단(BTS)의 RM(김남준)이 2021년 쾌척한 1억원에 힘입었다.

PEM 활옷은 오는 5월 미국으로 돌아가면 재개관하는 PEM의 한국실(유길준 갤러리)에 상설전시된다. 이에 앞서 4월6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PEM의 또 다른 보존처리 유물인 8폭 병풍 ‘평안감사 도과급제자 환영도’와 함께 만나볼 수 있다. 관람 무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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