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는 지난달 16일 국가폭력 피해자 이준휘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관련 보도: [뉴스9] 강제 징집·구타 피해자에게 “어차피 군 복무 했어야”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77307)
1980년, 이준휘 씨는 연세대학교 단과대 학생회장으로서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가, 이후 경찰에 체포돼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습니다.
전두환 신군부가 민주화 운동을 하는 대학생을 군에 강제로 입영시키고, 제대한 뒤에도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던 '녹화공작'의 1기 대상자가 된 거였습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보안사 대공분실로 끌려가 "네가 이러다 적근산에서 그냥 죽어도 누구 하나 알 수 없다"는 협박과 함께 수차례 얼차려를 당했던 기억…
'다 잊고 살아가자' 다짐하며 취업도 하고, 가정을 꾸려 묵묵히 살아왔지만,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가 된 지금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엔 꺼지지 않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고 이 씨는 KBS 취재진에게 털어놨습니다.
■ '피해자 탓' 피고 대한민국 측 답변서에…"큰 충격"
지난해 7월, 이 씨는 국가를 대상으로 국가 폭력 피해에 대한 배상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그런데 소송 과정에서 피고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군 법무관이 쓴 답변서를 읽고, 이 씨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답변서에는 "헌법상 국방의 의무는 누구나 해야하는 것"이라며 "원고는 어떤 형태로의 복무를 하여야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던 겁니다.
당시 이 씨는 오랜 도피 생활과 경찰서에서의 '얼차려' 등으로 인해 '서혜부 탈장' 진단을 받았는데도, 신체검사를 한지 이틀 만에 바로 군대로 끌려가, 환부를 붕대로 감고 강제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병적기록표에도 '탈장'이라는 진단명이 버젓이 적혀있는데, 피고 대한민국 측은 '어쨌든 이 씨는 군대에 가야 했다'는 논리를 편 겁니다.
또 피고 대한민국 측은 답변서에서 "원고는 다른 녹화사업의 피해자들과 같이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신청 등의 권리구제 노력을 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 원고와 같이 아무런 진실규명 노력을 하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청구가 인용된다면 권리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게 되어 불합리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피해자 본인이 진실규명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국가폭력 피해자를 탓하는 대답을 내놓은 겁니다.
이준휘 씨 국가배상청구 소송 관련 피고 대한민국 측 답변서 중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는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거해 항일독립운동, 해외동포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권위주의 통치 시에 일어났던 중대한 인권침해 등을 조사하는 국가 차원의 독립적인 조사기관입니다.
진화위는 지난 2020년 12월 10일부터 2022년 12월 9일까지 진실규명 신청을 접수 받았는데, 이 씨는 해외에서 오래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 진화위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본인의 피해를 접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피고 대한민국 측은 답변서에서 이 씨를 '권리 위에 잠자는 자'로 규정한 겁니다.
정작 진화위는 당시 녹화공작과 관련한 진실규명을 미처 신청하지 못한 피해자들을 고려해, 3년 전에 이미 정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권고했습니다.
<녹화·선도공작 피해자 관련 진화위 권고(2022년)>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피해 회복 조치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의 개인별 피해 사실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는 조사 기구 설치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 및 배·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
정부가 3년 전 진화위의 권고를 성실히 이행했다면, 이 씨는 관련 특별법에 따라 개별 피해를 규명할 수 있는 조사기구를 통해 피해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부는 해당 권고를 아직도 이행하지 않고 있으면서, 법정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피해자만 탓하는 답변을 내놓은 겁니다.
녹화공작 피해자 이준휘 씨와의 인터뷰 장면
"(답변서를 보고) 저도 굉장히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고. 대학 시절 4학년 1학기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또 그다음에 석·박사도 공부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열심히 살았는데. 민주화를 위해서 싸웠다는 이유로, 경찰서에서 훈방된 지 이틀 만에 신체 검사를 받아야 되고, 이틀 만에 아픈 몸을 이끌고 군대를 가라고 했는데. 그러면 대한민국의 모든 군인은 징집관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군대로 끌려갔나요? 그 답변서를 쓴 본인에게 그렇게 해도 병역의 의무를 다할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녹화공작 피해자 이준휘 씨 인터뷰 중에서 |
■ 납북귀환어부 국가폭력 피해엔 "과거 과오 반성"…'극과 극' 답변서
반면, 지난달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해 "수사기관의 과거 과오를 반성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적힌 답변서가 제출돼 주목을 받았습니다.
해당 답변서는 1960년대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국가폭력 피해자의 국가배상청구 소송 과정에서 쓰였습니다.
백령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던 피해자 박홍수 씨는 '무진호'를 타고 1967년 10월 출항했다가 북한에 의해 선박째로 납치됐습니다.
박 씨는 두 달만에 풀려났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곧바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곧바로 수사기관으로 끌려가 반공법 위반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박 씨는 수사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해 KBS 취재진이 만난 박 씨의 배우자 손순애 씨는 "(남편의 몸에) 말도 못하게 멍이 들어있었다"면서 "분명히 이 사람은 매 맞아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습니다.
(관련 보도: [뉴스7] 납북어민 ‘국가폭력’ 확인…“피해 당사자들은 몰랐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050663)
박 씨의 유가족은 진화위에 관련 진실규명을 신청했고, 지난 2023년 12월 '무진호' 탑승 선원들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이 이뤄졌습니다.
지난해 5월, 박홍수 씨 배우자 손순애 씨와의 인터뷰 장면
이후 박 씨 유족 등이 제기한 국가배상청구 소송에서 피고 대한민국을 대변한 군 법무관은 답변서에서 원고의 청구 기각을 구하면서도 "단, 과거사 사건의 특성상 입증 상황에 따라 추후 인정 범위가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이어 다음과 같이 "피고는 과거 수사기관의 과오를 반성하고 피해자, 유족의 인권을 존중하는 성실한 자세로 소송을 수행하고자 한다"고 답변서
고 박홍수 씨 유족 국가배상청구 소송 피고 대한민국 측 답변서 중
통상 피고 대한민국 측이 국가폭력 사건의 특수성은 무시한 채 '공소시효 만료' 등을 이유로 들며 국가폭력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해달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입니다.
특히 앞서 설명한 이준휘 씨의 소송 과정에서 제출된 '2차 가해성' 답변서와는 정반대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어떻게 이런 답변서를 작성할 수 있었을까, KBS 취재진은 궁금해졌습니다.
해당 법무관은 KBS 취재진의 질의에 "최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는 취지에서 답변서를 작성했고, 이후 법무부의 승인을 받고 답변서가 제출됐다"고 전했습니다.
■ 권고 이행률? "절반도 안돼"…진화위 조사는 올해 5월 종료
이처럼 같은 국가폭력 피해에도 '진화위의 진실규명 결정이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 피고 대한민국의 답변은 '극과 극'으로 달라졌습니다.
2022년까지 피해자들의 진실규명 신청을 받은 2기 진화위의 조사 활동 기간은 오는 5월 26일까지인 상황.
2기 진화위의 활동이 연장될지, 혹은 3기 진화위가 새로이 발족할지 여부조차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취재진은 더불어민주당 박정현 의원실을 통해 '별도 조사기구 설치' 등 진화위의 권고를 정부가 얼마나 이행해왔는지 확인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정부는 5년 전에 출범한 2기 진화위의 권고사항을 지난해 10월까지 절반도 이행하지 못한 거로 드러났습니다.
만약 2기 진화위가 오는 5월로 종료되고 3기 진화위가 발족하지 않는다면, 이준휘 씨와 같은 일부 피해자들은 정부가 관련 권고를 이행하지 않아 별도 조사기구를 통해 진실규명을 할 수도 없고,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새로 신청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이달 11일, 과거사 피해자 단체는 진화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기 진실화해위를 마무리하고, 관련 법 개정을 통해 조사권한을 강화한 3기 진실화해위가 새로 출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2기 진화위는 아직까지 사건 4천7백여 건에 대한 조사도 마치지 못했는데, 진화위 측은 이대로 조사기간이 종료되면 사건 3천여 건이 '미결'로 남을 거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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