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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 후 달라진 삶

집회 참여 강요 등 인간 관계 뚝
대화주제는 ‘부정선거’로 바뀌어
‘역사 제대로 알자…’ 진로 변경도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12일로 100일째다. 44년 만의 충격적인 비상계엄 선포 사태로 정치·사회적 혼란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국민 개개인에게도 그간의 인간관계나 일상을 뒤집는 변화가 일어났다. 국민일보는 계엄 이후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랜 관계의 단절

직장인 안모(29)씨는 계엄 이후 20년 지기 A씨와의 관계가 끊겼다. A씨는 계엄 사태 이후 종종 카카오톡 메신저에서 “윤 대통령은 이제 혼자가 됐다. 불쌍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안씨는 이런 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오랜 친구 사이엔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안씨가 계속 화제를 돌리자 A씨는 돌연 “공감받지 못해 속상하다”며 안씨와의 카톡뿐 아니라 전화 연결을 모두 차단했다. 안씨는 “정치 문제로 20년간 이어온 관계가 한 번에 끊어질 줄 몰랐다”고 말했다.

서울에 사는 김모(32·여)씨는 최근 남자친구 B씨와 이별했다. B씨가 계엄 이후 유튜브에서 급속히 퍼져나간 ‘부정선거론’에 빠져든 게 발단이었다. B씨는 김씨에게 탄핵 반대(반탄) 집회에 같이 나가자고 제안했다. 김씨는 “주변 사람들 영향으로 부정선거론에 빠진 것 같았다”며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설득해봤지만, 도리어 내가 잘못됐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씨가 반탄 집회 참여 제안을 거절하자 결국 B씨는 크게 화를 냈다. 김씨는 그 순간 가치관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이별을 결심했다. 김씨는 “자기 생각을 강요하고, 반대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남자친구의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고 했다.

대학교수 김모(55)씨는 지인들과 하던 공부 모임을 지속할지 고민에 빠졌다. 평소 학술 토론 위주로 진행되던 모임 주제가 한순간 부정선거론으로 채워졌다. 김씨는 “박사 학위도 있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인데 나를 제외한 대다수가 부정선거론을 믿더라”며 “그 자리에서 부정선거론을 믿지 않는다는 얘기를 꺼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역사학 공부로 진로 변경

12·3 비상계엄을 통해 새롭게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관심을 두게 돼 공부를 시작한 이들도 있다.

일본 오사카에서 어학연수 중인 이지연(25·여)씨는 계엄 사태 이후 역사학 석사 과정을 밟기로 했다. 이씨는 대학원에 진학할지, 취업할지 고민이 컸다. 하지만 계엄 사태 이후 ‘역사를 제대로 알고 살자’는 마음을 먹게 됐다.

이씨는 역사 연구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운동의 역사를 공부하고 왜곡된 역사 서술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그의 계획이다. 이씨는 “제주 4·3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사건들이 여전히 ‘폭동’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일이 없도록 민주주의운동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5학년 자녀를 둔 양소영(45·여)씨는 요즘 민주주의 관련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평소 자녀와 찾던 작은 도서관에서 ‘민주주의에 할 말 있는 시민들의 독서모임’ 프로그램이 생긴 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양씨는 “계엄 당일 악몽을 꿀 정도로 불안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혼자 생각하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다른 이들과 생각을 나눌 수도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사람들과 직접 모여 함께 민주주의 연구 도서를 읽으니 생각이 확장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180도 달라진 정치 관심도

계엄은 정치 관심층을 무관심층으로 돌아서게 하고, 정반대로 정치 무관심층을 관심층으로 바꾸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였던 직장인 서모(31)씨는 “정치 무관심을 넘어 냉소주의자에 가깝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서씨는 민주당을 지지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지만, 계엄 사태 이후 회의감이 극대화됐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런 가치들이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사람들의 반응이 맹목적인 믿음 같다. 일단 반대 의견부터 지워놓고 생각을 한다”고 지적했다. 또 “어떤 집회든지 나가는 것 자체가 어떤 큰 세력의 ‘장기 말’로 쓰이는 거란 생각밖에 안 든다”고 덧붙였다.

반면 정치 이슈에 별 관심이 없던 길모(25)씨는 계엄 사태를 계기로 뉴스를 열심히 챙겨보고 있다. 길씨는 “전반적으로 삶 전체에서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에 관한 관심은 계엄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많은 주제로 관심이 확장됐다”며 “어떤 사안이든 일단 관련 뉴스부터 찾아보게 됐고, 이제는 내 견해를 확립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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