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자기가 여전히 으뜸인 줄 아는 우두머리 수컷 침팬지 같았다. 석방된 윤석열 대통령은 구치소 앞을 당당히 걸으며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입을 앙다문 채 미소 짓는 특유의 꾸러기 표정이었다. 그는 간간이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환호를 끌어냈다. 비상계엄으로 나라를 대혼란에 몰아넣고, 국격을 추락시킨 내란 수괴치고는 너무나 태연하고 뻔뻔했다. 윤 대통령은 왜 전혀 부끄러움이 없을까? 온 국민이 내란 사태로 엄청난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손실을 입었음을 그는 정녕 알지 못하는 걸까?
우리말에서 부끄러움은 적어도 두 가지 정서를 아우른다. 먼저 이들을 구별하자. 첫째, ‘쑥스러움(embarrassment)’이다. 내가 던진 아재 개그에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으면 나는 어색하고 쑥스럽다. 둘째, ‘수치심(shame)’이다. 내가 공개석상에서 무심코 내뱉은 욕설을 수많은 청중이 들었다면 나는 괴롭고 수치스럽다. 그러니 이 글은 부끄러움의 두 번째 용법, 수치심에 대한 글이다. 왜 윤 대통령은 낯가죽이 두꺼워 수치심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수치심이 어떤 진화적 기능을 수행하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정서인지 새겨서 이 의문에 답해보자.
인류가 진화한 먼 과거의 소규모 수렵·채집 사회에서 남들로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수백만 년 전에는 의료보험도, 소액 생계비 대출도, 실직 수당도 없었다. 살다가 어느 때인가 크게 다치거나 중병을 앓거나 음식이 바닥나면 가족, 친구, 지인들로부터 긴급 구호를 받을 수 있는지가 생사를 판가름했다. 즉, 내 가치를 떨어뜨리는 부정적 정보가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나감을 잘 차단했던 진화적 조상이 다음 세대에 자손을 더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진화심리학자 다니엘 스니저를 따르면, 수치심은 나에 대한 나쁜 정보가 남들에게 새어나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내 평판이 떨어지는 사태를 막아주게끔 ‘설계’된 정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워왔음을 직장 동료들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고 하자. 당신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어깨가 축 늘어지고, 동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 수치심이 만드는 이러한 행동은 다른 동물에서 우위 개체에 혼난 열위 개체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때 취하는 행동이다. 말 그대로 몸을 작고 약하게 만들어 “나는 네 밑이야. 이제 안 기어오를 테니 용서해줘”라는 신호이다. 최근의 한 연구는 누군가의 부적절한 처신을 알게 된 청중은 그가 청중을 향해 눈을 마주칠 때보다 눈을 내리깔았을 때 분노가 한층 더 누그러지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주의 사항이 있다. 수치심은 내가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가 아니라, 나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들은 집단 내 구성원들이 속으로 내 평판을 낮추었거나 낮추려고 할 때 생긴다. 내가 정말로 잘못을 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결백할지언정, 소중한 지인들의 속마음에서 내 이름 위에 엑스 표가 크게 쳐졌다면 진화적 의미의 대참사는 이미 일어난 셈이다. 예컨대, 마약을 전혀 하지 않은 연예인도 마약 투약 혐의가 공개적으로 보도되면 심한 모멸과 수치심에 시달린다.
이제 윤 대통령이 별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까닭을 추측해보자. 수치심은 당사자에 대한 부정적 정보가 새어나가 남들 사이에 그 사람의 평판이 하락하는 상황을 방지하게끔 진화한 정서라는 이론이 맞는다면, 당사자의 부적절한 행동을 보거나 듣는 청중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중요하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당사자와 청중의 관계에 따라 당사자의 평판이 떨어질 수도, 그대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청중에 오직 내 편만 있다면, 내가 부적절한 행동을 해도 그들의 마음에서 내 평판이 떨어질 가능성은 작다. 이를테면, 가족은 언제나 내 편이기에 집에선 잠깐 벌거벗어도 별로 수치심이 들지 않는다.
윤 대통령의 청중은 누구일까? 만약 윤 대통령이 부적절하게 처신하면 그에게 낮은 평점을 매길까 염려되어 살뜰히 챙겨야 하는 청중은 누구일까? 물론 계엄에 찬성하는 소위 ‘애국 시민’이다. 뭘 모르는 전체 국민은 계몽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화적 시각에서 우리는 윤 대통령이 언제 수치심을 느낄지 예측할 수 있다. 만약 재수감이 두려워서 계엄을 참회하고 반성하는 성명을 발표한다면, 그는 성난 애국 시민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선을 회피하는 행동을 할 것이다.
자기가 여전히 으뜸인 줄 아는 우두머리 수컷 침팬지 같았다. 석방된 윤석열 대통령은 구치소 앞을 당당히 걸으며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입을 앙다문 채 미소 짓는 특유의 꾸러기 표정이었다. 그는 간간이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환호를 끌어냈다. 비상계엄으로 나라를 대혼란에 몰아넣고, 국격을 추락시킨 내란 수괴치고는 너무나 태연하고 뻔뻔했다. 윤 대통령은 왜 전혀 부끄러움이 없을까? 온 국민이 내란 사태로 엄청난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손실을 입었음을 그는 정녕 알지 못하는 걸까?
우리말에서 부끄러움은 적어도 두 가지 정서를 아우른다. 먼저 이들을 구별하자. 첫째, ‘쑥스러움(embarrassment)’이다. 내가 던진 아재 개그에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으면 나는 어색하고 쑥스럽다. 둘째, ‘수치심(shame)’이다. 내가 공개석상에서 무심코 내뱉은 욕설을 수많은 청중이 들었다면 나는 괴롭고 수치스럽다. 그러니 이 글은 부끄러움의 두 번째 용법, 수치심에 대한 글이다. 왜 윤 대통령은 낯가죽이 두꺼워 수치심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수치심이 어떤 진화적 기능을 수행하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정서인지 새겨서 이 의문에 답해보자.
인류가 진화한 먼 과거의 소규모 수렵·채집 사회에서 남들로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수백만 년 전에는 의료보험도, 소액 생계비 대출도, 실직 수당도 없었다. 살다가 어느 때인가 크게 다치거나 중병을 앓거나 음식이 바닥나면 가족, 친구, 지인들로부터 긴급 구호를 받을 수 있는지가 생사를 판가름했다. 즉, 내 가치를 떨어뜨리는 부정적 정보가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나감을 잘 차단했던 진화적 조상이 다음 세대에 자손을 더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진화심리학자 다니엘 스니저를 따르면, 수치심은 나에 대한 나쁜 정보가 남들에게 새어나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내 평판이 떨어지는 사태를 막아주게끔 ‘설계’된 정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워왔음을 직장 동료들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고 하자. 당신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어깨가 축 늘어지고, 동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 수치심이 만드는 이러한 행동은 다른 동물에서 우위 개체에 혼난 열위 개체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때 취하는 행동이다. 말 그대로 몸을 작고 약하게 만들어 “나는 네 밑이야. 이제 안 기어오를 테니 용서해줘”라는 신호이다. 최근의 한 연구는 누군가의 부적절한 처신을 알게 된 청중은 그가 청중을 향해 눈을 마주칠 때보다 눈을 내리깔았을 때 분노가 한층 더 누그러지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주의 사항이 있다. 수치심은 내가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가 아니라, 나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들은 집단 내 구성원들이 속으로 내 평판을 낮추었거나 낮추려고 할 때 생긴다. 내가 정말로 잘못을 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결백할지언정, 소중한 지인들의 속마음에서 내 이름 위에 엑스 표가 크게 쳐졌다면 진화적 의미의 대참사는 이미 일어난 셈이다. 예컨대, 마약을 전혀 하지 않은 연예인도 마약 투약 혐의가 공개적으로 보도되면 심한 모멸과 수치심에 시달린다.
이제 윤 대통령이 별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까닭을 추측해보자. 수치심은 당사자에 대한 부정적 정보가 새어나가 남들 사이에 그 사람의 평판이 하락하는 상황을 방지하게끔 진화한 정서라는 이론이 맞는다면, 당사자의 부적절한 행동을 보거나 듣는 청중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중요하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당사자와 청중의 관계에 따라 당사자의 평판이 떨어질 수도, 그대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청중에 오직 내 편만 있다면, 내가 부적절한 행동을 해도 그들의 마음에서 내 평판이 떨어질 가능성은 작다. 이를테면, 가족은 언제나 내 편이기에 집에선 잠깐 벌거벗어도 별로 수치심이 들지 않는다.
윤 대통령의 청중은 누구일까? 만약 윤 대통령이 부적절하게 처신하면 그에게 낮은 평점을 매길까 염려되어 살뜰히 챙겨야 하는 청중은 누구일까? 물론 계엄에 찬성하는 소위 ‘애국 시민’이다. 뭘 모르는 전체 국민은 계몽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화적 시각에서 우리는 윤 대통령이 언제 수치심을 느낄지 예측할 수 있다. 만약 재수감이 두려워서 계엄을 참회하고 반성하는 성명을 발표한다면, 그는 성난 애국 시민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선을 회피하는 행동을 할 것이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