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부도난 중견 건설사 신일건설의 서초구 방배동 공사 현장. 김범준 한국경제신문 기자
‘4월 위기설’이 돌아왔다. 2023년 말 당시 종합시공능력평가 16위에 달했던 태영건설이 워크아웃(기업 재무구조 개선작업)을 신청하면서 한 차례 불거진 뒤 1년여 만이다.
이번에도 뇌관은 건설·부동산이었다. 시공능력평가 순위 58위의 신동아건설이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데 이어 대저건설(103위), 삼부토건(71위), 대우조선해양건설(83위) 등 제법 이름이 알려진 100위권 내 중견 건설사들이 연이어 ‘법정관리 신청 리스트’에 올랐다.
그런데 유통업체인 홈플러스까지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하면서 위기설은 건설업에서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이 같은 사례로 인해 투자심리와 함께 유동성 공급이 위축되면 결국 위기가 확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걱정스레 ‘잔인한 4월’을 기다리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지난 ‘4월 위기설’의 역사를 돌아보면 대부분 기우에 그치고는 했다.
그러나 3~4월이 한 해 실적, 무엇보다 손실이 드러나는 어닝시즌이라는 점과 갖가지 대내외적 변수가 집중된 시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오랜 경기침체로 저성장 국면에 진입할 수 있는 현시점에서 올해 4월 위기설이 우리 경제에 던지는 의미는 크다.
숨길 수 없는 손실, 표면으로
현대건설은 2월 22일 실적발표를 통해 23년 만에 영업손실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손실 규모는 1조2209억원으로 자회사인 현대엔지니어링의 해외현장 사업비용이 급증하면서 발생했다.
그럼에도 현대건설은 만기가 다가오는 차입금 약 3300억원을 리파이낸싱하기 위해 공모채를 발행한 결과 모집액 1500억원의 2배인 3000억원 회사채 발행에 성공했다. 시장에서 지난해 영업손실이 잠재적 부실을 털어내는 ‘빅배스(Big Bath)’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이처럼 4분기에 각종 비용이 반영되는 회계처리 방식으로 인해 연간 실적과 사업보고서, 감사보고서가 나오는 이듬해 2~3월은 사업 손실이 드러나는 시기로 알려져 있다. 일부 기업은 경영진 교체와 더불어 지난 손실을 털고 새해를 맞이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부실이 이미 심각한 상태의 회사에는 감추고자 했던 장부가 드러나며 유동성 위기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다. 부실기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용등급 하락, 유동성 경색이 잇따르는 악순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준공 시점에서 손실이 반영되는 것이 일반적인 건설사들은 더욱 그렇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지금 대놓고 위기설이 도는 회사보다 조용한 곳이 더 위험할 수 있다”며 “특히 해외사업 부실은 더 숨기기가 쉬운 편”이라고 설명했다.
IMF에 놀란 가슴, 위기설 상시화
‘어닝시즌 리스크’는 국내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도 연말 결산 시즌을 맞아 3~4월 위기설이 돌고는 했다. 미국의 ‘닷컴 버블’ 붕괴는 2000년 초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 첨단기술 기업들의 실적이 고공 행진하는 주가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거품론’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 2001년 12월에는 미국 최대 에너지 회사였던 엔론이 파생금융상품을 이용해 재무부실을 숨겼다는 사실이 들통나 파산했다.
일본은 1990년대 자산 버블붕괴 이후 수시로 3~4월 위기설을 겪었다. 일본 금융기관이 3월에 결산을 하면서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을 회수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 기관은 자국 내 주식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는데 오랜 저성장과 엔화 약세에 따른 손실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해외 선진국의 위기설은 한국에서도 위기설을 부채질했다. 국내에 ‘IMF 외환위기’로 널리 알려진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인해 전과 달리 위기에 대한 공포가 커진 탓이다. 특히 2000년대에는 국내 기업 또는 가계부채 부실 등으로 인한 외국계 자본 유출에 상당히 민감했다.
이로 인해 카드채 위기가 불거졌던 2003년과 뉴욕발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에는 4월 위기설이 크게 확산했다. 3월 일본 은행 결산과 6월 미국·유럽계 금융기관의 중간결산 시기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2008년부터 100대 건설사 중 절반이 구조조정에 돌입하기 시작했는데 2009년 1월에는 시공능력평가 19위 풍림산업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주택시세는 2009년 잠시 반등하기도 했으나 결국 일시적 반등인 ‘데드캣바운스’에 그쳤고 2010년을 기점으로 국내 부동산 시장은 장기 침체로 접어든다.
2011년에는 결국 부동산 호황기에 대규모 PF대출을 실행했던 저축은행들이 영업정지를 당하기 시작했다. 2009년 1월 삼화저축은행, 2월 부산저축은행을 기점으로 5년간 30여 개 저축은행이 퇴출됐다. 그러나 2022년 부동산 PF 문제가 다시 등장하자 약 10년 만에 새마을금고에서 ‘뱅크런’이 재현되기도 했다.
저성장 기로, 메마른 유동성
이처럼 건설·부동산 부실 위기는 연말, 연초에 불붙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국내 금융권의 특성도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관치금융’이 팽배한 금융업계에서 중앙의 ‘가이드’를 기다리는 은행권이 우선 지갑을 닫는다. 그사이 유동성을 수혈받지 못하면 위기를 맞게 되는 사례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KB국민은행 등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11월 말 서울 강동구 소재 올림픽파크포레온(둔촌주공재건축) 입주를 앞두고 일제히 대출제한 조치를 해야 했다. 정부에 연초 ‘연간 가계대출 목표치’를 제출했는데 상반기에 이를 상당부분 소진했기 때문이다. 결국 해가 바뀌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내년 초부터는 가계대출 관련 실수요자에 자금 공급을 더욱 원활히 하고 특히 지방 부동산 가계대출 관련해서는 수요자가 더욱 여유를 느끼게 하겠다”고 발언하면서 대출 문턱은 지난해에 비해 낮아진 상태다.
전과 달리 외부 변수보다 내수경기 문제가 위기설의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동안 외국계 자본 유출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국 경제의 체급이 커졌고 현재 부실 위험이 제기되고 있는 건설과 유통이 모두 내수산업이라는 이유에서다. 2013년 저유가 쇼크에 따른 중동 플랜트 부실 문제로 위기를 겪었던 건설업계는 국내 주택사업 비중을 더욱 확대해왔다.
그러나 일시적 위기에 그칠 수 있는 외부 변수와 달리 일본처럼 내수 불황이 지속된다면 장기적 저성장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는 “한국의 순대외금융자산이 1조1000억 달러 규모로 돈이 남아서 해외에 빌려주고 있는 수준으로 외부에서 자본을 회수해 위기에 처하는 상황은 IMF 때 이야기”라며 “건설과 홈플러스 위기는 내수경기가 너무 망가진 탓”이라고 분석했다.
건설업계는 정부가 2월 19일 내놓은 ‘지역 건설경기 보완 방안’(2·19 대책)에 대한 후속 대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주택건설협회는 3월 6일 3000가구 규모로 계획된 LH의 지방 미분양 주택 매입 물량을 확대하고 대출총량제 폐지, 미분양주택 취득 시 5년간 양도세 한시 감면 및 다주택자에 대한 취득세 중과 배제 등을 건의했다.
정원주 주택건설협회 회장은 “국가경제에 있어 실물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주택건설업이 대내외 경제여건 악화에 따라 유동성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현재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어 국민 주거안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주택업계 건의에 귀 기울여 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