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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에너지부 전경. 한겨레 자료 사진

미국의 에너지 정책과 원자력 연구·개발 및 군 핵무기 프로그램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에너지부(DOE)가 한국을 ‘민감국가’(Sensitive Counrty)로 분류해 규제하는 조치에 착수한 것으로 9일 한겨레 취재 결과 확인됐다. 민감국가로 분류되면 원자력·인공지능(AI) 등 미국 첨단기술 분야와의 교류·협력이 엄격히 제한된다. 한국이 미국 정부에 의해 민감국가로 분류되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를 두고선 최근 한국에서 대두되고 있는 ‘핵무장론’에 제동을 걸기 위해 미 정부가 강력한 경고를 보낸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한국과 미국의 소식통들에 따르면, 미국 에너지부는 4월15일부터 한국을 민감국가로 분류하기로 하고 산하 국립연구소들에 이를 사전 통보하는 등 행정적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미 에너지부는 국가 안보나 핵 비확산, 지역적 불안정성, 경제안보 위협, 테러지원 등의 이유로 민감국가를 지정하고, 이들 국가의 연구기관이나 학자들과의 교류를 엄격하게 제한한다.

미국의 동맹인 한국은 그동안 항상 ‘비 민감국가’였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민감국가 명단로 분류된다는 공문이 에너지부 산하 연구기관들에 이달 초에 통보되었다고 한다. 공문에는 기존의 인도, 이스라엘,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대만 등에 더해 이번에 새로 한국을 비롯한 4개국을 4월15일부터 민감국가 명단에 추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민감국가 명단 안에서도 북한과 이란 등은 ‘테러지원국’, 중국과 러시아 등은 ‘위험국가’로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미국 국책 연구소의 한 연구자는 “4월15일 (명단이) 발효되자마다 그에 따라 모든 행정처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하도록 3월 초에 공문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이 연구자는 “정부가 이번 조치가 이뤄진 이유는 공유하지 않았는데, 연구소 내 연구자들 모두 한국이 민감국가 명단에 포함됐다는 데 놀라고 난감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에너지부 누리집을 보면, 국가 안보, 핵 비확산, 지역적 불안정성, 경제안보 위협, 테러지원 등의 이유로 민감국가를 지정할 수 있으며, 에너지부 산하의 정보기구인 정보방첩국(OICI)이 국가원자력안보국(NNSA) 등과 함께 이 리스트를 관리한다.

한국이 갑작스럽게 민감국가로 분류된 원인은 한국 정치권과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핵무장론일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원자력 분야 전문가인 이춘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초빙전문위원은 “미국 에너지부는 원자력 산업부터 핵무기에 들어가는 핵물질까지 모두 관리하는 부서이고, ‘민감국가’를 분류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핵확산 우려”라며 “한국에서 핵무장론이 확산된 것이 이번 조치의 가장 핵심적인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핵무장론이 계속 확산되는데, 월성원전의 원자로 4기(1기는 폐로중)는 플루토늄을 바로 추출할 수 있는 중수로여서 미국이 더욱 경계한다”며 “미국은 한국의 약점을 다 파악하고 있고, 한국이 실제로 핵 무장이나 핵 잠재력을 향해 움직일 경우에 더 강하게 제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용원 국민의힘 의원을 비롯해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참여한 국회 ‘무궁화포럼’이 지난달 12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한국형 핵추진 잠수함 도입 전략과 비전’ 토론회를 열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유용원 국민의힘 의원실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계속 증강되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무시 기조가 뚜렷해지자 국내 정치권에서는 자체 핵무장 필요성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나경원·윤상현·유용원 의원과 홍준표 대구시장 등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자체 핵무장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도 ‘핵 잠재력’(핵무기는 만들지 않지만, 언제든 핵 무장이 가능한 능력을 갖추자는 주장)을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분류하기로 하면서 정치권의 무책임한 핵무장론이 한국의 안보를 강화하기는커녕 큰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 에너지부의 규정을 보면, 민감국가로 분류될 경우 원자력 분야를 비롯해 인공지능(AI), 양자과학, 첨단 컴퓨팅 등을 비롯한 첨단 과학기술 협력을 엄격하게 제한되기 때문이다. 민감국가 출신 연구자들은 미 에너지부 관련 시설이나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것은 물론, 관련 연구에 참여하는 데도 엄격한 신원조회와 승인 절차가 필요해진다. 미국 국립연구기관과 대학에서 원자력 관련 기술, 인공지능, 양자 과학 등과 관련한 연구 참여가 금지될 수도 있다.

국가안보실에서 기술·사이버안보 업무를 담당했던 장용석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원은 “실제로 한국이 민감국가로 분류된다면, 미국과의 첨단기술 협력 전반이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며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 등 새로운 과학기술 획득이 매우 중요해진 시기인데, 미국과 과학기술 협력이 어려워지면 한국은 대단히 엄중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그는 “민감국가 리스트는 에너지부가 다른 정보기구와 함께 관장하기 때문에 한국이 대응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이런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외교부는 한겨레의 취재가 시작된 뒤 “관계 부처들과 관련 내용을 확인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은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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